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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moon love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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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믿나요..?-
「난 운명 따윈 믿지 않아..」
-그럼.. 당신의 그 믿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요?-
「내가 믿는 건.. 단 두 가지뿐이야. 삶에 대한 내 의지와.. 날.. 이토록 사랑해 준 당신에 대한 내 사랑..」
-난.. 당신이 잘 해낼 것이라 믿어요. 비록 내가 당신 곁에 없더라도........... 내 사랑을 받아줘서 함께한 시간들 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내 사랑 주한........... 이젠.......... 안녕............-



*여신 베르단디(Belldandy)에게 이 글을 바친다

1.
「그에게 물어보라구」
스즈끼가 말했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주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모르는 일이라고 몇 번을 얘기 했잖나」
「난 당신에게 그 일로 따지려고 여기온건 아냐. 내가 알고 싶은건 단지 놈의 행방에 대한 정보야. 알겠어? 놈에 대한 정보라구」
「오.. 이봐. 당신은 내가 무슨 만물 정보통이라고 되는 줄 아나?」
「물론. 당신은 놈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어」
깊이 눌러 쓴 모자 아래로 날카로운 시선이 스즈끼를 쳐다보았다
「주한 씨. 어지간히 좀 하라구. 난 그저...」
「사업가라 그거지? 스즈끼. 난 지금 유감스럽게도 당신과 말장난할 여유가 없어. 난 의뢰를 받아 이미 의뢰인으로부터 착수금을 받았어. 그건 당신이 좋은 싫든 난 이미 이번 일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는걸 의미하지」
스즈끼를 노려보던 주한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굳어 지금 당장 생각이 안난다면 굳이 재촉하진 않겠어. 내가 당신에 관한 파일들을 경찰에게 전달하면 당신은 물론 당신 가족들 모두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일 오후 6시까지 내게 전화를 걸어. 그리고 놈의 은신처를 말해. 내 핸드폰 번호는 알테지?」
스즈끼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주한은 그의 책상 앞으로 명함을 던지고서 사무실을 나왔다

-주한-
「료. 경찰 쪽의 움직임은 어때?」
-꽤 근접한 모양이야. 잘못하면 경찰에게 선수를 잡히겠어-
「그건 안 되지. 의뢰인은 이번 일을 우리가 조용히 처리하길 원하고 있어」
-뭔가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거야 주한?-
「..다 내게 맡겨둬. 료, 넌 지금처럼 계속 경찰 쪽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해줘. 뭔가 일이 생기면 바로 내게 메시지 날리고」
-몸조심해 주한-
「물론」
공중전화 부스에서 수화기를 내려놓은 주한은 부스 유리창 너머 도로를 바라보았다. 뿌옇게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찰칵
낮은 기계음과 함께 원룸에 불이 켜졌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주인님-
낯익은 목소리에 주한은 무거운 눈을 겨우 떴다. 생긋 웃는 표정의 ‘미나’가 주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았어.. 일어날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한바탕 크게 기지개를 켠 주한은 터벅터벅 샤워 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곁으로 타올과 기타 잡다한 세면도구를 든 미나가 따라 왔다
「미나. 지난번처럼 샤워하는데 갑자기 전화 받으라고 불쑥 안으로 들어오진 마. 얼마나 깜짝 놀랬다구」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여전히 생긋 웃는 얼굴로 미나가 주한에게 손에 들고 있던 타올을 건넸다. 타올을 받아 쥔 주한은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다소 기계적인 동작으로 미나는 손을 뻗어 샤워실의 문을 닫아주었다

거리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화려한 입체 나온 사인들이 도로 가를 메웠고 차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공중에 뜬 자동차들이 빠르게 달려 지나갔다. 주한은 스타벅스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또 전쟁이로군」
주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구 곳곳에서는 이미 크고 작은 전쟁들이 진행 중이었다. 유럽 전역에서는 신(新) 나치주의자들의 게릴라 활동이 극에 달해 있었고 일본에서는 연일 이어지는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느라 특별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이었으며 중동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서구간의 문명 충돌이 불안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3달간 휴전 협정을 맺었다 다시 개전된 남미에서 벌어진 국가간 전쟁은 이미 10년 이상을 끌어오고 있었다. UN(United Nation)은 수수방관 중이었고 미국은 남미 국가들에게 대량의 무기를 제공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전쟁 특수로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19살에 입대해 5년간 LLE(LA Legion Etrange-프랑스 외인부대)에서 특급 스나이퍼(Sniper-저격수)로 복무했던 주한도 제대 뒤 1년간 파라과이의 용병으로 싸운 적이 있었다. 생화학 무기와 소형 핵무기까지 동원되던 추잡하고 진절머리 나는 전쟁이었다
-고객님 더 주문하시겠습니까?-
서빙 로봇이 주한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주한은 신문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됐어. 현금으로 계산하지. 거스름돈은 팁으로 받아둬」
-감사합니다 고객님. 좋은 하루 되십시오-
햇살이 내리쬐는 인도를 따라 걷는 주한의 뒤로 로봇이 몸을 구부려 커피 잔과 신문을 치우고 있었다

삑삑
「예 주한입니다」
-나요 스즈끼. 지금 당장 좀 와줘야겠어 당장-
폰 너머로 스즈끼의 숨넘어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막 잠자리에 누워 눈을 붙이려던 주한은 창가에 서 있던 가정용 서비스 로봇 미나에게 담배를 갖다달라는 손짓을 하며 스즈끼의 말에 대꾸했다
「..만날 필요는 없고 간단하게 놈이 어디에 있는지만 말해」
-아냐 그게 아냐! 내가 당신과 만난 걸 놈이 알아챘어. 놈은 날 죽이려 들 거야. 아마 솜씨 좋은 살인 로봇 하나를 내 사무실과 집으로 보내겠지. 그럼 나 하나쯤 죽이는 건 식은죽 먹기 일거야.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까지도-
「알았어 알았어 스즈끼 씨. 진정해. 지금 어디야?」
-...이 전화 지금 도청되는 건 아니겠지?-
「좋아. 그럼 지금 당장 내 오피스텔 앞으로 와. 어딘진 알지?」
-물론. 지금 당장 가겠어. 이봐 이건 알아둬. 당신이 내 생명을 보장해줘야 나도 당신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줄 수 있어-
「그래 잘 알지. 빨리 오기나 해」
-당신만 믿겠어. 그럼-

「여기야 여기!」
스즈끼가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주한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주한은 차로 걸어가 스즈끼의 옆 좌석에 앉았다
「미행은 없었겠지?」
「몰라 난 그딴 건 몰라.. 난 그저 평범하게 물건을 팔고 돈을 버는 사업가야. 적어도 당신이 내 약점을 쥐고 날 협박하기 전까진 그랬지」
「좋아 좋아 그래. 우선 차를 몰아」
「어딜 가자는 거야?」
「그럼 여기 차 안에서 이렇게 죽치고 앉아 장거리 저격 소총에 인간 표적이 되고 싶나?」
「..맞아 당신 말이 맞아」
스즈끼가 황급히 차에 시동을 걸고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한숨을 돌린 주한은 스즈끼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항상 단정하던 모습과는 달리 흐트러진 머리에 안경도 겨우 코에 걸칠 정도로 쓰고 있었다. 주한은 시선을 돌려 차 내부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스즈끼는 그런 주한에게 물었다
「뭐하는 거야?」
「잠자코 앞만 보며 차를 몰아」
그렇게 대꾸한 주한은 좌석 시트 아래에서 뭔가 작고 까만 물체를 꺼내들었다
「이럴 줄 알았어」
「그건 또 뭐야?」
「위치 추적 장치. 놈도 당신을 죽이는데 어지간히 신경을 쓰는 모양이군. 폭탄을 설치했으면 당신은 이미 죽었을 텐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걸 알아둬. 당신은 모르겠지만 경찰 쪽에서도 지금 당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어. 때문에 놈도 당신을 함부로 해치지 못하는 거지. 아마 지금 우리 뒤에는 놈이 보낸 암살자가 따라붙고 있을 거야. 기회가 생기면 조용히 당신을 처리하려는 속셈이겠지」
「그.. 그럼 이제 어떻게..」
「서울 야외 쪽으로 차를 몰아. 최대한 조용한 곳으로」
「당신 미쳤어? 아무런 무기도 없이 놈과 어떻게 싸울 작정이야?. 그냥 그걸 밖으로 던져버리면 되잖아. 그럼 놈은 날 찾지 못할..」
「못 알아듣는군 스즈끼 씨. 그렇게 하면 지금 당장은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겠지만 놈은 끈질기게 따라붙어 언젠가는 결국 당신을 죽이고 말거야. 그리고.. 무기가 없긴 왜 없어?」
당황해하는 스즈끼를 향해 씩 웃어 보인 주한은 긴 외투 안쪽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결합하기 시작했다. 불과 30초 만에 주한의 손에는 레이저 유도방식 8.92mm 구경의 저격 소총이 쥐어져있었다
「이만하면 되겠나? 날 믿어」
주한은 스즈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살고 싶으면 차에서 내려서 아무 은폐물이나 뒤에 숨어 빨리」
주한은 스즈끼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다급히 안전벨트를 푼 스즈끼는 문을 열고 굴러 떨어지듯 내려서 해안가의 바위 뒤로 달려가 몸을 웅크렸다
「와라..」
주한은 배율을 조정한 뒤 소총의 적외선 야간 투시 스코프에 눈을 갖다 대고서 가만히 차창 뒤편을 응시했다. 밤이 되어 어둠이 내리깔린 해안가의 차도에는 인적은 물론 야생 짐승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주한은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뚫어지게 전방을 응시했다. 어차피 총알 한방의 싸움이다. 내가 적을 맞히지 못하면 내가 죽고 적이 날 맞히지 못하면 적이 죽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긴장과 신속함이 관건이었다. 먼저 적을 발견하는 쪽이 살아남는 싸움이다
차도 저편에서 뭔가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은 불빛이 번쩍였다. 주한은 재빨리 총구를 그쪽으로 돌렸다. 승용차 한 대가 차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차 문이 열리며 내린 건 아마 직장에서 늦게 귀가하는 듯한 젊은 여성 한명 이었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났다. 여자는 아직 차도에 서서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운전 도중 차가 고장나 수리 센터로 통화를 하는 모양이군. 주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여전히 소총을 겨눈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한의 주변에는 파도치는 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메웠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문득 여자의 발치 너머 지평선 도로에서 달빛에 반사된 작은 불빛이 반짝였다. 주한은 순간적인 본능으로 그 불빛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놈이다..!-
타앙!
불빛이 반짝이고서 미처 1초도 지나기 전에 소음 제거필터에 의해 극도로 낮아진 총성과 함께 주한의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탄환의 발사와 함께 생겨난 화약 연기가 사라지자 차 뒷 유리에 커다란 균열이 가며 작은 탄환 구멍이 생긴 것이 보였다
소총을 내려놓고서 품에서 꺼낸 소형 쌍안경으로 피격 지점을 한참 바라보던 주한이 창가로 고개를 내밀어 스즈끼에게 소리쳤다
「됐어! 그만 나와」
어둠 속에서 스즈끼가 주저하듯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됐는지는 직접 가보면 알거 아냐 스즈끼 씨」
주한의 손짓에 스즈끼는 운전석에 앉았다
「저기 뒤편에 서 있는 차가 한대 보이지? 그 차를 지나서 한 100미터 쯤 가보자구」
 스즈끼는 차를 유턴시켜 주한이 가르친 지점으로 차를 몰았다. 주한은 소총을 분해해 주머니 속으로 다시 넣으며 힐끗 시선을 돌려 차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아까 그 젊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웅크린 채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저기 있군」
여자가 시선에서 사라지자 주한은 짧은 휘파람을 불며 스즈끼에게 차를 멈추게 한 뒤 함께 내려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처참하게 뭉개졌군..」
스즈끼는 쓰러져있는 물체 가까이로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총탄은 정확히 목표물의 안면에 적중했다. 쓰러진 시체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손에는 중거리 저격용 고압축 살상 레이저 건이 쥐어져 있었다
「역시나 기계였구만」
시체의 몸체는 아직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주한은 시체의 머리 곁에 앉아 박살난 고철 더미 속을 헤집어 조그만 칩 하나를 꺼내들었다
「로봇의 행동 프로그래밍이 저장된 메모리야. 기념으로 가져야겠어」
스즈끼를 향해 손에 든 칩을 흔들어 보인 주한은 곧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이로서 당신과 당신 가족의 생명은 안전하게 됐어. 자 이제 내가 당신을 살려줬으니 당신도 날 살려줘야지 안 그래?」
「무.. 물론. 정말 감사해 당신에게」
스즈끼는 몇 번을 주한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감사했다. 그리고는 주한의 귓가로 입을 가져가 나직이 짧은 단어 하나를 속삭였다
「호오.. 거기란 말이지?」
주한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스즈끼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자유야. 오늘 있었던 일은 깨끗이 잊어버려. 내가 갖고 있던 당신에 관한 파일들은 모두 폐기하지. 그리고 진심으로 충고 한 가지 더 하자면 집에 돌아가거든 그 많은 돈 썩히지 말고 경호 로봇이나 한 대 구입해. 특히 재 프로그래밍 되지 않는 기종으로. 내 생각에 당신 주변엔 당신 돈을 노리는 녀석들이 많을 거야」
「그래 맞는 말이야.. 나.. 나중에 다시 만나면 당신에게도 후사하지」
「우린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야 스즈끼 씨. 어서 가. 곧 경찰이 올지도 몰라」
「그.. 그럼」
스즈끼는 서둘러 차에 올라탄 뒤 차를 급진시켜 달려 나갔다. 스즈끼의 차를 바라보던 주한은 차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자리에 앉아 더미 속을 파헤쳐 자신이 쏜 탄두를 집어 들었다

「이봐요!」
갑자기 들려온 여자의 외침에 주한은 깜짝 놀라며 곁을 쳐다보았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어.. 엄머. 저게 뭐야?」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주한에게 뭔가를 얘기하려던 여자는 주한의 옆에 자빠져있는 시체를 보자 갑자기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보면 몰라요? 고철 덩어리 아뇨」
주한은 탄두를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소 퉁명스레 대꾸했다
「사.. 사람이 아니고???」
「고기와 고철도 구분 못해요? 그나저나 어디 다쳤어요? 발목을 절고 계시네」
「아아.. 자세히 보니 로봇이었네. 어쩜.. 사고났나봐 불쌍도 해라 호호 음.. 참 그게.. 차도에 서 있는데 갑자기 발목에 통증이 와서요 하하. 너무 아파서 들고 있던 핸드폰도 떨어뜨려 고장이 나버렸네요. 너무 아파서 참기도 힘들고.. 그래서 그러는데 다름이 아니라.. 저기 핸드폰 좀 잠깐 빌려주실래요?」
여자는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몹시 아픈 표정이었다. 뜯겨져나간 여자의 발목 바지자락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까 주한이 총을 쏘았을 때 탄환이 여자의 발목을 가까이 스쳐지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주한은 내심 좀 마음이 뜨끔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발목을 한번 봅시다」
「아.. 아뇨 고맙지만 그건 됐구요. 핸드폰만 한번 잠깐 빌려 주시면 되는데 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하하. 차량 서비스센터에도 아까 전화했는데 아직 오지도 않네.. 왜지?」
여자는 순간 주한을 치한으로 착각이라도 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주한은 맹한 표정으로 순간 뒤통수에 흘러내리던 땀 한 방울을 털어낸 뒤 짧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이봐요 나 나쁜 사람 아니니까 너무 생색내진 말아요. 난 그저 예전에 의료 기술을 좀 배운 적이 있어서 응급처치나 해 주려고 한 것뿐인데」
「아 아뇨.. 전 그런 뜻이 아니라. 암튼 짧게 한통화만 하고 바로 돌려드릴게요」
주한의 폰을 받아 든 여자는 번호를 누르더니 어디론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주한은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저.. 여기. 감사 합니다 그럼 이만..」
주한에게 폰을 돌려준 여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아픈 발목을 이끌고서 자기 차로 되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수년의 시간을 군 특수부대와 전쟁터에서 보낸 주한은 이미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 상처가 심각한 상태임을 알아보고 있었다.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깐 어떡할까 망설이던 주한은 문득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그녀를 쫓아가 팔을 붙들었다
「딴소리말구 앉아 봐요. 구급차 올 때 까지 응급처치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 발목을 절단해야할지도 몰라요」
「절.. 절단요?」
여자는 뒤따라 온 주한에게 갑작스레 팔을 붙잡히자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주한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여자의 팔을 붙잡고 차도 가의 풀밭으로 데려가 앉힌 뒤 뜯겨진 발목 부근의 바지 자락을 올려보았다. 겁먹은 눈동자로 가만히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던 여자는 상처가 드러나자 악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 내 발목이 왜 저래?」
「어유 심하게 다치셨네. 그것 봐요 내 말대로 응급처치 안했으면 큰일 날 뻔 했죠?」
여자의 발목은 엄청난 고속으로 스쳐지나간 탄환에 의해 피부와 근육 조직이 날카롭고 깊게 패여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주한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풀밭에 펼치고서 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열어 붕대를 집어 들었다. 언제 어떤 부상을 당할지 모르는 자신을 위해 24시간 지니고 다니는 소형 의료 가방 이었다
「우선 지혈을 해야 해요. 조금 아파도 참아요」
「네.. 네..」
여자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대답하자 주한은 가위를 꺼내 알맞은 길이로 붕대를 자른 뒤 발목 상처의 윗부분을 세게 동여매었다. 여자는 통증이 올 때 마다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다 됐나요?」
「아뇨 한 가지 더 남았어요」
「또 뭐예요?」
「단백질 융화 필름이라고. 이건 별로 안 아플 거예요. 그냥 상처에 붙이는 밴드라고 생각해요」
주한은 얇고 투명한 필름 한 장을 뽑아 들고 상처에 붙였다. 필름은 피부에 닿는 순간 녹아들 듯 상처에 들러붙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네... 아깐 되게 아팠는데 지금은 안 아프네요. 감사 합니다」
여자는 비명을 질러댔던 게 무안한 듯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했다. 주한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좀 수다스럽다 싶지만 앳되 보이는 어딘가 이국적인 인상을 풍기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상자를 다시 주섬주섬 코트에 챙겨 넣은 주한은 코트를 걸치고서 살짝 손을 내밀어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아.. 저기 견인차가 오네요」
여자가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견인차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주한은 여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말했다
「다행이네요. 견인차타고 얼른 병원부터 가도록 해요.. 얼른 낫길 바랍니다」
왠지 아까 전부터 뭔가를 망설이던 여자가 고개 숙여 작별 인사한 뒤 몸을 돌리려는 주한을 향해 문득 말했다
「저.. 저기요. 제 이름은 디에나라고 해요. 김.. 디에나. 실례가 아니면 그쪽 성함과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나중에라도 보답하고 싶어서..」
「내 이름요..?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여자가 갑작스럽게 이름을 묻자 주한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주저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주한은 시선을 돌려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해칠 것 같진 않은 착한 여자라 생각되었다
「주한입니다.. 주한」
잠깐 망설이던 주한은 그렇게 대답했다. 디에나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소개한 여자는 주한이 건네 준 명함을 받고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그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주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한 뒤 어느새 다가온 견인차를 향해 달려갔다

「디에나라..」
주한은 깊은 밤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오늘 우연찮게 만났던 그 여자를 떠올렸다.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주한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자신의 정보를 경찰이나 폭력 집단에게 팔아먹을 나쁜 여자 같지는 않았다. 주한은 이만 그녀에 대해 그만 생각하기로 하고 잠을 청하기 위해 몸을 뒤척이며 눈을 감았다

이틀 뒤
「저기란 말이지?」
바람 부는 61층 높이의 고층 빌딩 옥상 위에 주한은 서 있었다. 전쟁터에서 입던 위장복 대신 정장을 입고 위장 크림 대신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채로 선 주한의 검은 넥타이가 거세게 부는 바람에 춤추듯 휘날렸다
철컥
바닥에 내려놓은 검은색 노트북 가방을 연 주한은 노트북 대신 부속품들을 꺼내 조립을 하기 시작했다. 불과 수십 초도 되지 않아 주한의 손에는 18kg 묵직한 크기의 저격 소총이 쥐여져 있었다
주한은 소총을 손질하며 담배를 한대 꺼내 물었다. 이른 새벽이라 아직 주변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이따금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릴 뿐 고요했다
「더글라스 킴.. 나이 44세. 재미교포 5세. 키 192에 몸무게 91. LA의 한인 폭력조직 ‘하이에나’의 부두목. 살인 마약밀매 인신매매 등의 혐의로 현재 미 연방 수사국(FBI)과 인터폴(Interpol)의 수배를 받아 현재 통합 대한민국(United of South&North Corea)에 도피 중...」
주한은 삼각대를 설치하고 스코프의 배율을 조정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주한이 현재 위치한 자리는 목표 건물의 주변 지리 중에서 저격과 은폐, 그리고 신속한 이탈이 용이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였다
「현재 청담동 도슨 호텔 3012호에 거주 중....」
자신의 주변을 한번 쓱 훑어본 주한은 저격 준비가 끝나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뱉고 스코프에 눈을 갖다대었다. 총구는 호텔 3012호의 창문을 향하고 있었다
현재 시각 새벽 6시59분. 창가에서 미묘한 움직임이 일었다. 곧 커튼이 젖혀지고 파자마 차림의 건장한 몸을 가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난 당신이 누군지 무얼 하던 사람인지도 몰라..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건 이거야.. 세상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라는 거지」
주한의 입술이 내뱉듯 단어들을 중얼중얼 거렸다. 그리고 잠시 시간의 간격을 두고서 주한의 손가락이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낮은 총성과 함께 주한의 주변으로 소리의 파장이 울려 퍼졌다. 주한은 재빨리 소총을 내려놓고 쌍안경을 꺼내 들어 창가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창 밖의 아침 풍경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아침 체조를 하고 있던 남자는 거실 가득 피를 흘리며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의뢰는 완료 되었다」
핸드폰을 꺼내 든 주한은 그 짧은 한마디만을 말하고 폴더를 닫았다. 장비들을 챙겨 든 주한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서 한 모금 연기를 뿜어낸 뒤 빠른 걸음으로 옥상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료!」
「주한!」
여의도의 한 호프 바 스탠드에 앉아있던 주한은 료가 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자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전직 일본 공안부 형사 출신으로 프로 레슬러처럼 건장한 몸집에 긴 머리를 말총머리처럼 묶은 헤어스타일을 한 료도 주한을 알아보고서 마주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어때? 의뢰인은」
「몹시 만족스러워 하던걸. 약속대로 이백만 달러가 비밀 계좌로 이체 되었어」
「다행이네」
주한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대답했다. 료는 바텐더를 불러 맥주를 주문했다
「언제나 그렇듯 6:4로 나누자. 좋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줘」
주한은 약간 취기가 오른 눈길로 료를 바라보며 농담을 하듯 대꾸했다. 주한의 유머에 료도 쿡쿡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쨌거나.. 아직 남미 그라나다(Granada) 지구에서 악명을 떨치던 특급 스나이퍼 유령(Ghost)의 실력은 죽지 않은 것 같구만」
「유령... 맞아 그게 내 별명이었지」
주한은 왠지 허탈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료의 말에 홀로 중얼거렸다. 주문되어 나온 맥주를 단번에 마셔 잔을 비운 료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도쿄에서 막 돌아와 공항에 내릴 때부터 미행이 따라붙었어. 구석으로 따돌렸는데 아마 경찰 끄나풀이었겠지. 어쨌든 오늘은 이만 작별하자구 친구」
「그래.. 료」
「다음번 의뢰가 들어오면 또 연락하지. 그리고 술 적당히 마시고 오늘은 푹 자둬」
료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한의 어깨를 두드린 뒤 바의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갔다. 주한은 말없이 담배를 한 모금 문 뒤 깊게 연기를 뿜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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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神社務所님의 댓글

女神社務所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쓰시네요... 계속해서 건필 부탁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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