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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단편] 항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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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랑 나침반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는 하나밖에 없는 눈을 찡긋해 보이며 씨익 미소지었다. 갑판 위에는 작은 테이블, 서로의 앞에 놓인 구부정한 호리병 모양의 술잔에는 럼주가 절반쯤. 파도를 타고 오르는 뱃전의 흔들림에 맞추어 테이블 위에 놓인 오뚝이는 종횡무진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말이야, 하나밖에 못 본다는 점이라고."

잉크를 잔뜩 묻힌 붓으로 그는 흔들리는 오뚝이 위에 멋지게 안구 하나를 그려 놓았다. 뱃전에 걸린 등불들도 부산스레 움직이는 선원들도 모두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바라보는 가운데, 오뚝이 위에 그려진 눈은 그 어떤 흔들림도 없이 그저 하늘 위, 천정(天頂)에 고정되어 있었다.

발상의 전환에 조그마한 감탄을 터뜨리고 있는 나를 두고, 그는 갑판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거대한 나침반이 있는 곳으로 향해 나침반의 계기를 한 번 확인하더니만, 다시 아까처럼 씨익 미소지었다.

"북극성만을 바라보는 나침반 바늘과 천정만을 바라보는 오뚝이같은 인생, 그게 우리들 뱃사람이야. 그리고 작가 양반, 여기까지 우릴 따라온 당신도 비슷할지 모르겠구만 그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고 럼주를 들이켰다. 잉크통에 담은 우필이 양피지 위에 달렸고 이내 한 장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글덩이를 다른 원고들 사이에 끼워넣고, 나는 책을 완성하면 표지로 쓰기 위해서 육지에 있을 때 미리 만들어 두었던 금실로 짠 글귀를 무심결에 손가락으로 훑었다.

'아크 메일스트롬 정복기'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누구도 정복한 적이 없었던 중앙해협 아크 메일스트롬. 수많은 뱃사람과 예술적인 장인의 배들을 가라앉혀온 그곳을 넘어서 서대륙에 도착하는 것. 그것이 이 배에 탄 사람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글로 적어 남기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었다.

일단 지금은, 말이다.

만약에 이 배도 파선하고 조난당한다면, 또다시 살아남는 것이 내 가장 큰 꿈이 되겠지. 하지만 일단 배에 오른 이상 배가 가라앉는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뱃사람들의 특징이었고, 불안했던 나는 항해 첫날부터 이 사고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온 나로서도, 그와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해적처럼 보이는 커다란 선장모에 애꾸눈. 닻줄을 끌어올릴 때 온몸에서 폭발하는 듯이 출렁이는 근육은 신대의 영웅을 연상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스를 두거나 술을 마실 때의 그의 얼굴은 놀랍도록 차갑고 진지해서 마치 책과 달만을 벗삼아 살아온 백면서생같은 인상조차 주는 것이다. 그런 신비한 이가 맡고 있는 배라면 내 인생을 걸어도 좋을 거란 예감이 들어서, 나는 수많은 추천을 모두 뿌리치고 이 배 블루 트리톤호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아크 메일스트롬의 중심이라는 '폭풍의 심장' 지대에 돌입하자, 선장은 처음으로 객실에 있던 내게 독대를 청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자리가 이 파도 속의 술자리인 것이다.

선체와 함께 의자에 앉아 있던 내 몸도 들썩였다. 배멀미를 할 정도로 항해 경험이 적은 것도 아니건만 이 정도라면 파도가 아니라 해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앗핫핫핫핫! 좋-은 파도로구만!"

일등항해사의 선창과 선원들의 사나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연이 주는 거대한 공포에 인간의 몸으로 맞서기보다는 그것을 즐기는 쪽을 선택한 뱃사람들의 웃음은 무언가를 초월한 진정한 '즐거움'을 담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군요."

"걸어나가고 있기 때문이지."

나침반의 바늘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내 질문에 대답했다. 돛줄을 움켜쥐고 노를 당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선장의 대답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비가 오는 것도 아니건만 이물에 부딪혀 깨지는 잔파도 때문에 뱃전에 서 있던 선장의 옷은 흠쩍 젖어 있었다.

"나로선 글쎄, 참회일까?"

"참회? 무엇에 대한?"

술기운 탓일까,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레 반문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파도가 이물에 부딪혀서 선장의 뒷편에 무지개를 드리웠다.

"모든 것에 대한 참회."

무지개의 색깔만큼이나 수많은, 그러면서도 개념으로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뒷이야기나 쓰디쓴 비애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어디까지나 담담한, 마치 열반에 달한 현자의 입에서 나오는 듯한 '참회'라는 단어에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장은 더 이상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 거대한 파도를 가르는 사나이들의 땀방울만이 뜨거운 열기를 더했다.

"전속 전진! 폭풍의 심장 끝에 너희들의 영혼을 맡겨라!"

"Aye Aye, Captain! 전속 전진! 폭풍의 심장 끝에 너희들의 영혼을 맡겨라!"

우렁찬 선장의 명령을 일항사가 복창했다. 역풍을 거스르는 삼각돛이 의지를 가진 듯 펼쳐졌고, 이윽고 파도 위에서 배는 미친 듯이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

"그래서, 거기에 당신 영혼은 있던가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질문했다.

"나는 내 선원들의 영혼을 건 적은 있지만, 내 영혼을 건 적은 없었다네."

초점이 맞지 않는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력을 잃은 것이 분명한 남자는 딱딱, 왼손에 든 지팡이로 땅을 두들겼다.

"내 영혼은 이미 수십년 전, 내가 바다에 몸을 맡겼을 때부터 나를 떠나 있었으니까. 하긴 선원들도 마찬가지야. 그 놈들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개중에 몇 명은 알든 모르든 나처럼 육지에 자기 영혼을 묶어 놓고 있었을 테지."

끌끌끌. 메마른 웃음이 퍼졌다.

배를 잃은 선장의 모습은 무서우리만치 처량했지만, 아직 그에겐 왕년의 기백이 남아 있었다.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 내 나름대로의 참회라고 생각했네. 심해에서 끌어올린 알량한 지식으로나마 젊은 영혼을 저 너머로 인도하는 것."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옷자락 안에서 파이프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한동안은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불을 붙인 후에도 파이프를 위아래로 까딱거리며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곳에 내 영혼은 없네. 영혼이 없는, 아예 되찾을 방법조차 가지지 못한 자에게 이끌려 간 내 선원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들은 걸어나가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들었던 그의 이야기를 입으로 옮겼다. 그는 파이프 끝자락에 걸린 입술을 오므려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을 지도 모르지."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찌 되었든, 당신은 아크 메일스트롬의 첫 번째 정복자예요."

"그리고 그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지, 아, 작가 양반이 살아남았으니 이제 두 명인가."

내 격려의 서두는 맹인의 차가운 냉소에 의해 제지당했다. 사실이었기에 무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글을 써내려가야만 했다. 나는 내 글 위를 걷고 있었으며, 시나브로 내 글은 이제 블루 트리톤호에 대한 마지막 연결고리이자 속죄가 되어 있었기에.

"당신은 영혼을 육지에 묶어 놓고 왔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당신을 묶어 두고 있던 건 무엇이었습니까?"

그를 찾기 위해 몇 년 동안 부두에서 선원들과 함께 지냈다. 이전에 몇 번 배를 타봤을 뿐인 햇병아리 작가로서 그와 마주했을 때와는 달랐다. 취조라도 하듯 집요하게 나는 질문을 이어나갔다.

"망자들이지. 이제는 나의 빛을 빼앗고, 더 이상 바다로 도망치지 못하게 묶어 두고 있는 죽은 이들."

주머니에서 이제는 빛바랜 눈이 그려진 오뚝이를 꺼내어, 그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는 툭 쳐서 쓰러뜨렸다. 한때는 천정에서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던 오뚝이였지만, 지금 그 눈이 바라보는 건 천장에서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는 양초에 불과했다.

"떼어 놓으려 애써도, 무슨 짓을 해도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언제나 내 눈 앞에 아른거리지. 시력을 잃은 후로는 더 심해졌다네. 아크 메일스트롬의 정복자? 배와 함께 항구로 돌아오지 못했던 선장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 그의 말대로였다.

블루 트리톤호는, 아크 메일스트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침몰했다.

살아남은 것은 나와 내 원고 상자, 그리고 선장뿐. 아크 메일스트롬을 정복한 위대한 업적은 내 원고와 함께 세상에 밝혀졌고, 신출내기 작가에 불과했던 나를 명예의 전당에 올려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십수년 동안 이 바다 냄새 가득한 부두에서 그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당신은 바다로 가야 합니다."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크 메일스트롬의 첫 번째 정복자, 뱃사람으로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그 업적을, 당신은 후대에 전달해야 합니다. 블루 트리톤호가 스러졌던 그때의 기억을, 당신은 또다시 꺼내어 젊은이들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당신이 쓰게 해 주었던 제 글이, 당신의 가르침에 대한 무엇보다도 확실한 보증이 될 것입니다."

이미 멈춰서버린 오뚝이를, 나는 테이블에 부딪힐 정도로 세게 밀었다. 딱 하는 소리가 그를 놀라게 했는지 그는 오뚝이 쪽을 바라보았다.

따닥, 딱, 따닥.

수없이 바닥에 부딪히면서도, 오뚝이는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술집의 스윙도어 바깥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를 등지고,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속삭이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의 속죄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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