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난공필락難攻必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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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노멀이다.
뭐, 아버지라고 해도 친아버지는 아니다. 사진으로만 봤던 친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나를 지우려고 갖은 애를 다 썼지만 애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얼마나 억척스럽던지 술담배에 잿물까지 먹어 봐도 지워지지가 않더란다. 외할머니께 갓 태어난 나를 내던지듯 맡겨 놓고 종적을 감춘 지 10년 만에 나타난 어머니는 멀쩡한 딸이 실종된 슬픔을 자라나는 손녀로 달래던 외할머니에게서 다짜고짜로 나를 빼앗아서 들어올 때처럼 휙하니 다시 나가 버렸다.
뭐, 이런 어머니다 보니까 제대로 된 이유는 아니었다. 요컨대, 친아버지의 유언장이 좀 문제였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위험한 일을 하시던 친아버지는 생명보험과 함께 어머니한테는 비밀로 이런저런 저축을 해 놨던 모양인데, 그걸 언젠가 태어날 당신의 딸에게 유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나 없이 어떻게 해 보려고 부단히도 노력한 듯하지만, 아무래도 유전자적 친딸 없이는 어떻게 안 된 모양이다.
그리고 3년 후에, 어머니는 나한테서 뺏어간 재산으로 이제 스물일곱이 되는 장래유망한 청년을 하나 낚아서 재혼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내 '아버지'다.
그런데 이 사람, 정말 우리 어머니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착하고 매너 넘치는 사람이였다. 14년 차이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성을 만들어내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나이 차이였지만 그는 마치 친아버지가 있었다면 이랬을까 할 정도로 극진하게 날 챙겨줬고, 세간에서 쏟아지는 이상한 시선이나 수군거림조차 전부 무시했다.
그렇기에 난 생각했다.
저 빌어먹을 어머니의 마수로부터 이 남자만은 구해내자고.
그러므로 묻자─정상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을 페도필리아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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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고 보니까 굉장한 내용이네, 오오오오오, 오해를 살 것 같아서 정정하겠다. 난 딱히 아버지가 좋다거나 한 게 아니다. 쓸 때만 아버지라고 쓰고 보통은 '저, 저기...'라거나 하는 의미불명의 2인칭으로 아버지를 부르진 않는다고. 가끔씩 '오빠'라고 부르고 싶다거나, 열네 살 정도 차이나도 애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안 한다고!
그, 그저 동정심이다. 우리 어머니는 정말로 썅녀...아니, 교양 없는 여자라서, 돈만 있지 머리에 하나 들어찬 게 없어서 언제나 아버지를 곤란하게 한다. 책임감 반 애정 반 정도로 어떻게든 넘어가기는 하지만, 난처해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결론을 내린 거다. 내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면 어머니가 빼앗아간─이 바보는 아직 통장 명의도 바꾸지 않고 있다─재산을 되돌린 다음에 아버지랑 같이 어머니가 돈 없인 쫓아오지도 못할 곳, 그러니까 어디 외국에라도 떠서 아버지를 구해내자고.
합의이혼처럼 덜 극단적인 방법은 없냐고? 나는 어머니라는 여자를 안다. 외가에 지내던 때, 나는 좋아하는 인형이나 책 하나에 목숨을 걸 정도로 집착이 강했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이구, 누가 느 에미 딸 아니랄까봐 사사건건 티를 내요'라고 말씀하셨다. 뭔가 몰두할 만한 대상이 보이면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아지고 그것밖에 보이지 않게 되는 이 집착이 정말로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거라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포기하는 일은 결혼 주례의 말마따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을 때까지' 불가능하다. 그 집착이 아버지라는 남자를 전부 집어삼키기 전에, 물리적으로 떼어 놓을 필요가 있겠지.
하지만, 도망을 가기 위해선 일단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나를 더 사랑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 전제조건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노멀 취향인 아버지를 페도필리아로 개조할 필요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금기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명구조라고! 마더 테레사도 눈물을 흘릴 숭고한 행위다!
자, 서론은 이쯤 해두고.
나는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외국에서 생활하기 위한 영어 공부, 기본적인 재테크 지식와 함께 수많은 연애 지침서와 연애 소설, 만화까지 읽어가면서 수많은 연애 스킬들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고 그렇게 3개월을 꼬박 책 속에서 지낸 결과, 나는 오...아버지를 함락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장기 계획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오퍼레이션 난공필락.
내 열세 살 인생 전부를 걸고. 열세 살 짜리가 걸면 아동청소년의성보호를위한법에 저촉되는 위험한 것까지 전부 걸고, 바야흐로 나는 저 개...아니, 어머니와의 건곤일척의 승부를 눈 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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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작전, 일명 'Tiger 비뚤어졌어' 작전의 실행 전에, 눈을 감고 브리핑 화면을 머릿속으로 이미지한다. 자료 화면에서는 키가 큰 쪽이 작은 쪽의 넥타이를 바로잡아주며 연상의 매력을 어필했지만, 나는 내 상황을 고려해 또 다른 장면 하나를 어레인지해서 키가 작은 여자애가 실행해도 무리가 없는 그림을 만들어내었다.
요컨대, 넥타이를 잡아 끌어내리면 목이 졸린 남자는 저절로 허리를 숙이게 되고, 키가 좀 작더라도 키스할 수 있는 각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방금 봤던 연애 소설의 후배도 선배와의 첫키스에 이런 방법을 사용했고, '타이가 비뚤어졌어'라는 대사에 담긴 마력을 생각할 때 이 방법은 서로의 두근거림을 급진전시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아버지가 어버버거리면 그냥 '잘 다녀와'의 키스라고 얼버무리면 그만이다. 이 정도의 어필을 고작 이 정도의 리스크로 끝장낼 수 있다니, 생각해보면 참 유리한 포지션이구나. 딸내미란!
이미 어머니의 아침식사에는 미량의 즉효성 설사약을 섞어 두었다. 아버지가 출근하든 말든 배웅하러 나오지는 못할 테지. 잠깐 동안은 이 넓은 집의 감시의 눈길 없이 다다다다다, 단둘이 되는 것이댜!
하악, 하악.
나도 모르게 거칠어진 숨소리에 너무 오래 상상에 빠져 있었던 걸 깨달았다. 콩닥콩닥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방문 바깥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발소리에 신경을 집중한다. 이윽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 소리를 포착하자마자, 나는 방문을 열고 도도도도 뛰어가서 미리 거울을 보며 몇 번이나 연습해 뒀던 극상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녀오세요☆"
"응, 다녀올게."
언제나같은 아침 인사를 받고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일부러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아버지가 문고리 쪽으로 몸을 돌리려다 말고 '왜?'라는 말과 함께 동작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에, 나는 넥타이를 확인하고는 날렵한 동작으로 달려들어 넥타이를 힘껏 잡아당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목표 확인의 첫 번째 스텝에서부터 나는,
"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정말로 놀라 버렸다.
아니아니, 왜 하필 오늘따라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그 위에 조끼를 입으신 건가요?
"꽃샘추위라잖아, 조금 따뜻하게 입어야지 싶어서."
이 정도 추위라면 괜찮아아아아아아! 남자잖아! 그 정도는 근성으로 이겨내라고! 내가 본 자료에서는 겨울에 바깥에 나갈 때도 교복 앞섶을 다 풀어헤치고 식스팩을 내놓고 다니는 고등학생들도 엄청 많았다니까?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 아버지는 점점 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얼굴이 빨갛네, 괜찮아?"
하고 허리를 굽혀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아니,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계획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버리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뭔가 계획대로 되고 있는 듯한 이 상황은 대체...아니가까워가까워가까워오빠얼굴너무가까워어─!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아니, 지금 당신 때문에 양쪽 귀에서 맹렬한 기세로 수증기가 분출되고 있는데! 열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와와..."
눈이 뱅글뱅글 돌면서 뭐라고 말을 해보려고 했는데, 입에서는 말이 되지 못한 무언가만이 흘러나온다. 아버지는 살짝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럼 다녀올게."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리고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작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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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번의 작전 실패로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했다. 대국을 보는 자, 한 번의 패배에 얽매여 있어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천하를 움켜쥘 수는 없다─고 어떤 책에 써 있었다. 여기선 아까의 아버지의 이마 감초...아니 패배에 연연하느니, 새로운 작전을 재빨리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작전명 'B.A.P 풀이 붙었어.'
고래로 연인들 사이에 남의 볼에 붙은 음식물 대신 먹어주기는 애정표현 중에도 특상급에 속하는 애정표현이라 하더라. 추가적으로 먹을 때 살짝 웃으면서 하얀 치아와 붉은 혀를 살짝 보여주면 마치 속옷을 살짝살짝 보여주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높은 효과를 볼 수 있으며, 만약 어어어어, 얼굴을 내밀어서 입으로 직접 떼어줄 경우 키키키키, 키스 이상의 효과가 나온다는 것이 내가 참조한 인터넷 사이트의 내용이었다. 물론 이 사이트 자체가 이상한 페티시즘을 내포하고 있느니만큼 100% 믿는 것은 곤란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으리라. 난 아직 열셋이고, 노따...아니, 어머니의 푸석푸석하고 말라빠져서 화장품으로 가려야 되는 입술보다는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나이가 가지는 이점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나는 세부적인 플랜을 세웠다.
남은 건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는 것뿐. 기회는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오랜만에 함께하는 가족의 단란한 저녁식사. 눈치채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아버지의 입가를 유심히 관찰한다.
관찰한다.
관찰한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 마치지 마아아아─!
이 사람, 너무 테이블 매너가 좋다고!
나는 다급해졌다. 이래서는 밤을 새며 준비한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버린다. 다음 기회는 언제 올런지 불투명하고, 결행한다면 지금밖에 없다!
맞은편에 있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서, 나는 식탁보의 그림자 아래서 숟가락에 놓인 밥풀을 하나 들어, 신중하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의 입가에 안착하는 밥풀. 쾌재를 부를 새도 없이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아버지의 옷자락을 부여잡는다.
좋아, 이제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서 밥풀을 떼낸 뒤에 "아버지도 참, 칠칠지 못하게"라면서 생긋 웃으면서 집어먹으면 성공이다. 아까까진 아버지가 먹던 걸 집어먹는다는 생각에 조금 부끄럽기도 했었지만, 이렇게 되놓고 보니 내 밥을 튕긴 거라서 일말의 저항감조차 없다. 아버지 볼에 잠깐 묻었을 뿐인 내 밥 따위, 몇 번이라도 먹어줄 수 있어!
"아버지도 차─"
"어라, 밥풀이 묻었네...응? 뭐라고 했어?"
소리 없는 절규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세상이 무너져내린 듯한 표정으로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내 눈동자에 스민 절망의 무거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깐 동안 이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식기를 챙겨서 싱크대로 가져갔다. 나는 숟가락을 드는 것도 잊은 채, 장승처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식기를 정리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
방금 저 밥풀은 내가 먹던 숟가락에서 떼어내서 튕긴 거잖아.
다시 말해서 내 입술에 닿았던 밥이고─
그그그그그그그러니까 지금,
간접 키스, 해버린 건가?
그렇지?
그런 거지?
인생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가 내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했다.
세상 다 산 것 같은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고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천국에라도 올라갈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모습을 앞에서 밥을 먹고 있던 저 여자한테 들켰다간 아마 난 자살했을 테니까.
난 반쯤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작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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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메리 크리스마스, 선물은 나♡'
"리본 가지고 놀다가 잠들었나 보네. 침대에 데려다 주자."
공주님 안기는 좋았지만, 좋았지마아아아아안!
작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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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incoming'
"히익! 요즘 이런 게 얼마나 단속이 심한데..."
아버지는 주저 없이 Shift+Delete키를 눌렀다. 어린 소녀의 나체가 담긴 사진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삭제되었다.
얼굴은 적당히 가렸지만, 셀카라는 것 정도는 알아줬으면 했는데...
작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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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된 작전 실패로 사기는 땅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역시 열세 살로는 무리인 건가'같은 맥빠지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한 이상, 여기서 나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지평,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리며 '빨간색' 정도로 순화해서 말하고, 그 미묘한 단어마저도 절대로 자기 아이들에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 금기의 과실, 금단의 경지. 역시 19세가 넘은 아버지에게는 19세 이상만이 접할 수 있다는 소위 '19금'의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내가 도둑고양이녀...아니, 어머니의 재산을 꿀꺽하려고 생각했을 때부터, 어머니의 주민등록번호와 인감도장은 내가 확보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내 핸드폰은 어머니 명의로 만들어둔 상태였다. 준비는 충분했다.
그리고,
─이이이이이이이이이거거거거거거건사사사사사사사라라라라람이이이이이보보보보볼게게게게게게게게아아아아아아냐냐냐냐냐냐.
험, 험. 헛흠. 으흠, 앗흐...으음.
잠시 동안 정신이 흐트러졌던 것 같지만, 언제나처럼 냉철한 상태로 돌아온 나는 확실하고 강력한 다음 계획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일명, 작전명 '등짝을 보자'.
일단, 나는 어머니가 늦게 들어오고, 아버지가 점심 때 잠깐 동안 집에 들어오는 날을 물색했다.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노트에는 근 1년 동안 아버지의 동선이 빼곡이 적혀 있다. 이 노트에 의하면 매달 2번째와 4번째 수요일, 오후 3시쯤에 아버지는 10번 중에 8번 정도 꼴로 운동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집에 들어온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올 때 모든 준비가 끝나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학교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바로 조퇴했다. 어머니에게 연락이 가겠지만 그 사람답게 신경도 안 쓰겠지. 2시 30분,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럼, 준비를 시작해야지.
일단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주르륵 늘어놓았다. 너무 티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직선을 그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현관문부터 욕실 앞까지 옷을 하나씩 배치해 둔다. 양말, 웃옷, 치마, 속옷까지 꼼꼼하게.
이렇게 벗어 둔 옷은 아버지를 욕실 쪽으로 유인하는 이정표다. 뭐, 최소한 이런 상태로 인기척이 느껴지면 한 번쯤은 고개를 돌려 주겠지.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
그리고, 욕실 앞에 쳐둔 커튼을 활짝 열었다. 커튼걸이까지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의자를 가져와서 커튼을 묶고 걸어놓는다. 중간에 발을 헛디뎌서 떨어질 뻔 했지만 여기서 다쳐버려서야 지금까지의 준비가 모두 물거품이 된다.
마지막으로, 미리 뜨거운 물을 틀어놔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대로 그리 뛰어들어간다.
이번 작전의 준비는 끝. 진인사대천명이랬으니까, 남은 건 천명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미지근한 물을 맞으며, 새삼 자신의 몸을 훑어본다. 아까 본 야도...아니, 자료화면이랑은 좀 많...아니, 아주 쪼오금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피부는 하얗고 늘어진 군살 하나 없이 깨끗하다. 아버지가 아직 페도필리아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나름 여자애의 최후의 한수니까 어느 정도의 동요는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 기다리다 슬슬 우리 집 수도세가 걱정될 무렵즈음, 도어락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버지다. 다시 한 번 태세를 점검한다.
다행히도 들어온 지 시간이 그렇게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피부가 퉁퉁 불어버리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도 적당히 물을 머금어 몸에 달라붙었고, 문을 활짝 열어뒀으니까 수증기 때문에 내 모습이 안 보일 리도 없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한 발짝, 한 발짝, 기대와 불안을 절반씩 품은 채 나는 욕실 문 너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윽고 아버지의 단정한 얼굴이 저 너머에 나타나고, 아래쪽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머릿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계획대로다!
하지만 여기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아니, 완벽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법!
일단 아무것도 못 본 양 샤워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놓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한번 쭈욱 짜내면서 자연스레 양팔과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서
"아─?"
아버지의 출현이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
그대로,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일단 정지. 여기서는 중간의 미묘한 간격이 중요하다. 너무 빨리 말하면 속 보일 테고, 너무 늦게 말하려고 하면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아버지로서도 이 상황이 꽤나 의외였던 듯, 고개를 돌리거나 무슨 말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침묵의 시간이 지난다. 내가 처음에 참고했던 연애 만화에서는 이 경우 '꺄악─! 어딜 보는 거야─!'가 정석이겠지만 이미 나는 그 때의 어리석은 내가 아니다. '19금'의 지식으로 가일층 업그레이드된 나의 두뇌는 그런 비효율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만큼 충분히 성장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녀오셨어요?"
일단 생긋 웃으면서, 샤워기를 든 자세 그대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기서는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감히 태클을 걸 수 없을 정도의 자연스러움으로 심리적 부담을 줄이면 된다!
"응, 다녀왔어."
담담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는 아버지. 그 단정하고 화사한 미소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여기서 시선을 피하면 이도저도 안 된다. 조금 더 당당하게! 그 웃는 얼굴에 대고 나는 마지막 폭탄 선언을 날렸다.
"같이...씻으실래요?"
"그래, 그럴까?"
───에? 답이 너무 빨라?
1초의 간격도 없이, 즉답이 돌아와버렸다.
그리고,
"아아, 살 것 같아..."
"..."
전 살 것 같지 않은데요.
아버지는 전라였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할게. 아버지는 전라였다.
중요한 부분에는 타올을 둘러서 가리기는 했지만, 보통 샤워하고 있는 딸이 있는 욕실로 아무런 주저 없이 웃통 벗고 들어올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보다 피도 안 섞인 의붓딸이라고! 당신은 왜 이렇게 저항감이 없는 거야아아아아아!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쓰던 샤워기를 들어서 몸을 씻고, 내가 쓰던 비누로 비누칠을 하고, 욕조에 들어가서 목욕을 즐긴다.
완성된 남성의 몸이, 눈 앞에 있다.
군살 하나 없는 몸이란 이런 걸 말하는 것 같다. 잡지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멋진 근육질의 몸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쳐진 살도 군살도 하나 없이 발그레하게 혈색이 도는 흰 피부는 건강미를 한껏 발산하고 있고,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붙을 곳에 붙은 탄탄한 근육이 오히려 그 탄력을 더해서...
으아니지금내가뭘보고있는거야게다가뭘그렇게진지하게품평하고있는거야하지만눈앞에있는오빠알몸이알몸이알몸이─!
"저어, 괜찮아? 얼굴이 빨간데, 샤워 너무 오래 하고 있었던 거 아냐?"
"아아아아아아니에요!"
완전히 패닉 상태.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되지? 분명히 세부적인 계획을 이것저것 생각해놨던 것 같은데, 이젠 알몸밖에 눈에 안 들어와─!
"그럼 일단 나와봐, 등 밀어줄테니까."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등이라니니니니니니니.
눈이 빙글빙글 돈다. 마치 끓는 물이 들어간 주전자처럼, 머리 양쪽으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한계치를 넘은 자극에 이미 머리는 쇼트 상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욕조 바깥으로 나와서 앉았고,
차가운 배스 타올의 감촉 너머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프지 않도록 배려한 손길이 최대한 부드럽게, 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상냥함이 얇은 타올 한 장 사이로 그대로 내게 전해진다.
위험해.
몸이 떨리는 거, 들킬 것 같아...
샤워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비누를 씻어낸다. 그는 미지근한 물로 등을 구석구석 씻어주고, 마지막으로 내 머리 위에 그 보드라운 손을 얹고선,
"우리 딸, 너무 예쁜데?"
결정타를 가했다.
'이제 바깥에서 남자애들 조심해야겠다'느니 하는 뒷말을 들을 새도 없이, 나는 온 세상이 꽃밭으로 보이는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눈이 뜨였다.
"괜찮아? 역시 너무 오래 있었나 보구나."
눈 앞에, 아버지의 얼굴이 있다. 환상이 아닌지 확인이라도 해 보듯이 눈을 몇 번 깜박이고, 살짝 고개도 흔들어 봤다. 본인이 맞다.
여긴 내 방, 내 침대 위.
아버지는 침대 옆부분에 걸터앉아서,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는 나를 간호하고 있었다.
"목마르지 않아? 물 떠올까?"
"아뇨!"
금방이라도 일어나려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황급히 대답했다.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핀다.
"어지럽지는 않고?"
"이젠 괜찮아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머릿속에서 조금씩 맥락이 갖추어지자마자, 방금 전에 한 발언에 대한 맹렬한 후회가 밀려온다. 이 바보, 그럴 때는 아무리 멀쩡한 상태더라도 '아직 너무 어지러워요. 곁에 있어주세요'라고 말했어야지!
"아무데도 안 갈 테니까, 손 떼도 돼."
아버지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그러고 보면 방금 전에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을 아직 놓지 않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서 이불 속으로 집어넣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마음 속에서는 다시 한 번 '이 바보' 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하다못해 잘 때까지만이라도 아버지가 곁에 있어줬으면...'
조그마한 소망을 품어봤지만, 아마 무리일 거다. 애초에 잠깐 씻고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어왔을 뿐이고, 금방 나가봐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좀 더 오래 기절해있지 못한 게 아까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잠들 때까진 여기 있을게.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 하지 않아도."
내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보다. 방금 전보다 세 배는 더 부끄러워졌기에, 얼굴이 폭발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이불에 감싸여 보이지는 않았지만, 침대 가장가지에 아버지가 걸터앉는 것을 매트리스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불을 내리지도 못한 채, 두근거리는 가슴의 고동 소리가 들릴까 봐 가슴 위에 양 손을 얹고 뭔가 중요한 것을 숨기듯이 꼬옥 포개었다.
토닥.
아버지의 손이 내 왼쪽 어깨 위에 놓인다. 놀라서 몸을 움찔했지만, 그 따뜻함과 부드러움에 취해서 이내 몸의 긴장이 풀리고 만다.
토닥, 토닥.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듯, 아버지의 손이 고른 간격으로 내 어깨를 토닥인다. 무슨 두서너 살 먹은 애기도 아니고 열세 살 먹은 여자애를 이런 식으로 재우나 싶었지만, 토닥임이 몇 번 계속되자 그 온기에 꽁해 있던 마음도 눈 녹듯 녹아내려 버렸다.
이제는, 작전이든 뭐든 어떻게 되도 좋아.
그저,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이어졌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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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금방 잠이 들었다. 고르게 색색 숨소리를 내고 있는 아이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은 아이를 토닥이던 손을 떼고, 휴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불을 내려 본다. 열세 살짜리 아이의, 마치 천사같은 자는 얼굴.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가 순간 멈칫한다.
고사리같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는다.
"으응..."
잠든 아이의 입에서,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청년은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고는, 옷깃을 잡은 가드다란 손가락을 하나 하나 정성스레 펴 나간다. 이내 잠든 아이의 손이 그의 옷자락에서 떨어져 침대 시트에 조그마한 주름을 만든다.
발소리도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금살금 방을 나선다. 달칵, 문고리가 여닫히는 소리에 그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아이의 자는 얼굴을 바라본다.
위험해.
들킬 것 같아...
닫히는 방문 사이로,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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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키잡 소설. 군대에서 썼던 글인데, 오히려 바깥에서 쓸 때보다 문장기교나 라노베 호흡이 훨씬 더 잘 살아난 글이 되었습니다[...]
뭐, 아버지라고 해도 친아버지는 아니다. 사진으로만 봤던 친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나를 지우려고 갖은 애를 다 썼지만 애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얼마나 억척스럽던지 술담배에 잿물까지 먹어 봐도 지워지지가 않더란다. 외할머니께 갓 태어난 나를 내던지듯 맡겨 놓고 종적을 감춘 지 10년 만에 나타난 어머니는 멀쩡한 딸이 실종된 슬픔을 자라나는 손녀로 달래던 외할머니에게서 다짜고짜로 나를 빼앗아서 들어올 때처럼 휙하니 다시 나가 버렸다.
뭐, 이런 어머니다 보니까 제대로 된 이유는 아니었다. 요컨대, 친아버지의 유언장이 좀 문제였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위험한 일을 하시던 친아버지는 생명보험과 함께 어머니한테는 비밀로 이런저런 저축을 해 놨던 모양인데, 그걸 언젠가 태어날 당신의 딸에게 유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나 없이 어떻게 해 보려고 부단히도 노력한 듯하지만, 아무래도 유전자적 친딸 없이는 어떻게 안 된 모양이다.
그리고 3년 후에, 어머니는 나한테서 뺏어간 재산으로 이제 스물일곱이 되는 장래유망한 청년을 하나 낚아서 재혼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내 '아버지'다.
그런데 이 사람, 정말 우리 어머니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착하고 매너 넘치는 사람이였다. 14년 차이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성을 만들어내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나이 차이였지만 그는 마치 친아버지가 있었다면 이랬을까 할 정도로 극진하게 날 챙겨줬고, 세간에서 쏟아지는 이상한 시선이나 수군거림조차 전부 무시했다.
그렇기에 난 생각했다.
저 빌어먹을 어머니의 마수로부터 이 남자만은 구해내자고.
그러므로 묻자─정상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을 페도필리아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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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고 보니까 굉장한 내용이네, 오오오오오, 오해를 살 것 같아서 정정하겠다. 난 딱히 아버지가 좋다거나 한 게 아니다. 쓸 때만 아버지라고 쓰고 보통은 '저, 저기...'라거나 하는 의미불명의 2인칭으로 아버지를 부르진 않는다고. 가끔씩 '오빠'라고 부르고 싶다거나, 열네 살 정도 차이나도 애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안 한다고!
그, 그저 동정심이다. 우리 어머니는 정말로 썅녀...아니, 교양 없는 여자라서, 돈만 있지 머리에 하나 들어찬 게 없어서 언제나 아버지를 곤란하게 한다. 책임감 반 애정 반 정도로 어떻게든 넘어가기는 하지만, 난처해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결론을 내린 거다. 내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면 어머니가 빼앗아간─이 바보는 아직 통장 명의도 바꾸지 않고 있다─재산을 되돌린 다음에 아버지랑 같이 어머니가 돈 없인 쫓아오지도 못할 곳, 그러니까 어디 외국에라도 떠서 아버지를 구해내자고.
합의이혼처럼 덜 극단적인 방법은 없냐고? 나는 어머니라는 여자를 안다. 외가에 지내던 때, 나는 좋아하는 인형이나 책 하나에 목숨을 걸 정도로 집착이 강했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이구, 누가 느 에미 딸 아니랄까봐 사사건건 티를 내요'라고 말씀하셨다. 뭔가 몰두할 만한 대상이 보이면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아지고 그것밖에 보이지 않게 되는 이 집착이 정말로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거라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포기하는 일은 결혼 주례의 말마따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을 때까지' 불가능하다. 그 집착이 아버지라는 남자를 전부 집어삼키기 전에, 물리적으로 떼어 놓을 필요가 있겠지.
하지만, 도망을 가기 위해선 일단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나를 더 사랑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 전제조건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노멀 취향인 아버지를 페도필리아로 개조할 필요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금기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명구조라고! 마더 테레사도 눈물을 흘릴 숭고한 행위다!
자, 서론은 이쯤 해두고.
나는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외국에서 생활하기 위한 영어 공부, 기본적인 재테크 지식와 함께 수많은 연애 지침서와 연애 소설, 만화까지 읽어가면서 수많은 연애 스킬들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고 그렇게 3개월을 꼬박 책 속에서 지낸 결과, 나는 오...아버지를 함락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장기 계획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오퍼레이션 난공필락.
내 열세 살 인생 전부를 걸고. 열세 살 짜리가 걸면 아동청소년의성보호를위한법에 저촉되는 위험한 것까지 전부 걸고, 바야흐로 나는 저 개...아니, 어머니와의 건곤일척의 승부를 눈 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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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작전, 일명 'Tiger 비뚤어졌어' 작전의 실행 전에, 눈을 감고 브리핑 화면을 머릿속으로 이미지한다. 자료 화면에서는 키가 큰 쪽이 작은 쪽의 넥타이를 바로잡아주며 연상의 매력을 어필했지만, 나는 내 상황을 고려해 또 다른 장면 하나를 어레인지해서 키가 작은 여자애가 실행해도 무리가 없는 그림을 만들어내었다.
요컨대, 넥타이를 잡아 끌어내리면 목이 졸린 남자는 저절로 허리를 숙이게 되고, 키가 좀 작더라도 키스할 수 있는 각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방금 봤던 연애 소설의 후배도 선배와의 첫키스에 이런 방법을 사용했고, '타이가 비뚤어졌어'라는 대사에 담긴 마력을 생각할 때 이 방법은 서로의 두근거림을 급진전시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아버지가 어버버거리면 그냥 '잘 다녀와'의 키스라고 얼버무리면 그만이다. 이 정도의 어필을 고작 이 정도의 리스크로 끝장낼 수 있다니, 생각해보면 참 유리한 포지션이구나. 딸내미란!
이미 어머니의 아침식사에는 미량의 즉효성 설사약을 섞어 두었다. 아버지가 출근하든 말든 배웅하러 나오지는 못할 테지. 잠깐 동안은 이 넓은 집의 감시의 눈길 없이 다다다다다, 단둘이 되는 것이댜!
하악, 하악.
나도 모르게 거칠어진 숨소리에 너무 오래 상상에 빠져 있었던 걸 깨달았다. 콩닥콩닥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방문 바깥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발소리에 신경을 집중한다. 이윽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 소리를 포착하자마자, 나는 방문을 열고 도도도도 뛰어가서 미리 거울을 보며 몇 번이나 연습해 뒀던 극상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녀오세요☆"
"응, 다녀올게."
언제나같은 아침 인사를 받고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일부러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아버지가 문고리 쪽으로 몸을 돌리려다 말고 '왜?'라는 말과 함께 동작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에, 나는 넥타이를 확인하고는 날렵한 동작으로 달려들어 넥타이를 힘껏 잡아당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목표 확인의 첫 번째 스텝에서부터 나는,
"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정말로 놀라 버렸다.
아니아니, 왜 하필 오늘따라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그 위에 조끼를 입으신 건가요?
"꽃샘추위라잖아, 조금 따뜻하게 입어야지 싶어서."
이 정도 추위라면 괜찮아아아아아아! 남자잖아! 그 정도는 근성으로 이겨내라고! 내가 본 자료에서는 겨울에 바깥에 나갈 때도 교복 앞섶을 다 풀어헤치고 식스팩을 내놓고 다니는 고등학생들도 엄청 많았다니까?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 아버지는 점점 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얼굴이 빨갛네, 괜찮아?"
하고 허리를 굽혀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아니,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계획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버리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뭔가 계획대로 되고 있는 듯한 이 상황은 대체...아니가까워가까워가까워오빠얼굴너무가까워어─!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아니, 지금 당신 때문에 양쪽 귀에서 맹렬한 기세로 수증기가 분출되고 있는데! 열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와와..."
눈이 뱅글뱅글 돌면서 뭐라고 말을 해보려고 했는데, 입에서는 말이 되지 못한 무언가만이 흘러나온다. 아버지는 살짝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럼 다녀올게."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리고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작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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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번의 작전 실패로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했다. 대국을 보는 자, 한 번의 패배에 얽매여 있어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천하를 움켜쥘 수는 없다─고 어떤 책에 써 있었다. 여기선 아까의 아버지의 이마 감초...아니 패배에 연연하느니, 새로운 작전을 재빨리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작전명 'B.A.P 풀이 붙었어.'
고래로 연인들 사이에 남의 볼에 붙은 음식물 대신 먹어주기는 애정표현 중에도 특상급에 속하는 애정표현이라 하더라. 추가적으로 먹을 때 살짝 웃으면서 하얀 치아와 붉은 혀를 살짝 보여주면 마치 속옷을 살짝살짝 보여주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높은 효과를 볼 수 있으며, 만약 어어어어, 얼굴을 내밀어서 입으로 직접 떼어줄 경우 키키키키, 키스 이상의 효과가 나온다는 것이 내가 참조한 인터넷 사이트의 내용이었다. 물론 이 사이트 자체가 이상한 페티시즘을 내포하고 있느니만큼 100% 믿는 것은 곤란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으리라. 난 아직 열셋이고, 노따...아니, 어머니의 푸석푸석하고 말라빠져서 화장품으로 가려야 되는 입술보다는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나이가 가지는 이점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나는 세부적인 플랜을 세웠다.
남은 건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는 것뿐. 기회는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오랜만에 함께하는 가족의 단란한 저녁식사. 눈치채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아버지의 입가를 유심히 관찰한다.
관찰한다.
관찰한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 마치지 마아아아─!
이 사람, 너무 테이블 매너가 좋다고!
나는 다급해졌다. 이래서는 밤을 새며 준비한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버린다. 다음 기회는 언제 올런지 불투명하고, 결행한다면 지금밖에 없다!
맞은편에 있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서, 나는 식탁보의 그림자 아래서 숟가락에 놓인 밥풀을 하나 들어, 신중하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의 입가에 안착하는 밥풀. 쾌재를 부를 새도 없이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아버지의 옷자락을 부여잡는다.
좋아, 이제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서 밥풀을 떼낸 뒤에 "아버지도 참, 칠칠지 못하게"라면서 생긋 웃으면서 집어먹으면 성공이다. 아까까진 아버지가 먹던 걸 집어먹는다는 생각에 조금 부끄럽기도 했었지만, 이렇게 되놓고 보니 내 밥을 튕긴 거라서 일말의 저항감조차 없다. 아버지 볼에 잠깐 묻었을 뿐인 내 밥 따위, 몇 번이라도 먹어줄 수 있어!
"아버지도 차─"
"어라, 밥풀이 묻었네...응? 뭐라고 했어?"
소리 없는 절규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세상이 무너져내린 듯한 표정으로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내 눈동자에 스민 절망의 무거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깐 동안 이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식기를 챙겨서 싱크대로 가져갔다. 나는 숟가락을 드는 것도 잊은 채, 장승처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식기를 정리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
방금 저 밥풀은 내가 먹던 숟가락에서 떼어내서 튕긴 거잖아.
다시 말해서 내 입술에 닿았던 밥이고─
그그그그그그그러니까 지금,
간접 키스, 해버린 건가?
그렇지?
그런 거지?
인생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가 내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했다.
세상 다 산 것 같은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고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천국에라도 올라갈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모습을 앞에서 밥을 먹고 있던 저 여자한테 들켰다간 아마 난 자살했을 테니까.
난 반쯤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작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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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메리 크리스마스, 선물은 나♡'
"리본 가지고 놀다가 잠들었나 보네. 침대에 데려다 주자."
공주님 안기는 좋았지만, 좋았지마아아아아안!
작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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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incoming'
"히익! 요즘 이런 게 얼마나 단속이 심한데..."
아버지는 주저 없이 Shift+Delete키를 눌렀다. 어린 소녀의 나체가 담긴 사진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삭제되었다.
얼굴은 적당히 가렸지만, 셀카라는 것 정도는 알아줬으면 했는데...
작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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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된 작전 실패로 사기는 땅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역시 열세 살로는 무리인 건가'같은 맥빠지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한 이상, 여기서 나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지평,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리며 '빨간색' 정도로 순화해서 말하고, 그 미묘한 단어마저도 절대로 자기 아이들에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 금기의 과실, 금단의 경지. 역시 19세가 넘은 아버지에게는 19세 이상만이 접할 수 있다는 소위 '19금'의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내가 도둑고양이녀...아니, 어머니의 재산을 꿀꺽하려고 생각했을 때부터, 어머니의 주민등록번호와 인감도장은 내가 확보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내 핸드폰은 어머니 명의로 만들어둔 상태였다. 준비는 충분했다.
그리고,
─이이이이이이이이이거거거거거거건사사사사사사사라라라라람이이이이이보보보보볼게게게게게게게게아아아아아아냐냐냐냐냐냐.
험, 험. 헛흠. 으흠, 앗흐...으음.
잠시 동안 정신이 흐트러졌던 것 같지만, 언제나처럼 냉철한 상태로 돌아온 나는 확실하고 강력한 다음 계획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일명, 작전명 '등짝을 보자'.
일단, 나는 어머니가 늦게 들어오고, 아버지가 점심 때 잠깐 동안 집에 들어오는 날을 물색했다.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노트에는 근 1년 동안 아버지의 동선이 빼곡이 적혀 있다. 이 노트에 의하면 매달 2번째와 4번째 수요일, 오후 3시쯤에 아버지는 10번 중에 8번 정도 꼴로 운동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집에 들어온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올 때 모든 준비가 끝나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학교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바로 조퇴했다. 어머니에게 연락이 가겠지만 그 사람답게 신경도 안 쓰겠지. 2시 30분,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럼, 준비를 시작해야지.
일단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주르륵 늘어놓았다. 너무 티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직선을 그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현관문부터 욕실 앞까지 옷을 하나씩 배치해 둔다. 양말, 웃옷, 치마, 속옷까지 꼼꼼하게.
이렇게 벗어 둔 옷은 아버지를 욕실 쪽으로 유인하는 이정표다. 뭐, 최소한 이런 상태로 인기척이 느껴지면 한 번쯤은 고개를 돌려 주겠지.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
그리고, 욕실 앞에 쳐둔 커튼을 활짝 열었다. 커튼걸이까지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의자를 가져와서 커튼을 묶고 걸어놓는다. 중간에 발을 헛디뎌서 떨어질 뻔 했지만 여기서 다쳐버려서야 지금까지의 준비가 모두 물거품이 된다.
마지막으로, 미리 뜨거운 물을 틀어놔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대로 그리 뛰어들어간다.
이번 작전의 준비는 끝. 진인사대천명이랬으니까, 남은 건 천명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미지근한 물을 맞으며, 새삼 자신의 몸을 훑어본다. 아까 본 야도...아니, 자료화면이랑은 좀 많...아니, 아주 쪼오금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피부는 하얗고 늘어진 군살 하나 없이 깨끗하다. 아버지가 아직 페도필리아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나름 여자애의 최후의 한수니까 어느 정도의 동요는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 기다리다 슬슬 우리 집 수도세가 걱정될 무렵즈음, 도어락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버지다. 다시 한 번 태세를 점검한다.
다행히도 들어온 지 시간이 그렇게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피부가 퉁퉁 불어버리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도 적당히 물을 머금어 몸에 달라붙었고, 문을 활짝 열어뒀으니까 수증기 때문에 내 모습이 안 보일 리도 없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한 발짝, 한 발짝, 기대와 불안을 절반씩 품은 채 나는 욕실 문 너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윽고 아버지의 단정한 얼굴이 저 너머에 나타나고, 아래쪽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머릿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계획대로다!
하지만 여기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아니, 완벽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법!
일단 아무것도 못 본 양 샤워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놓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한번 쭈욱 짜내면서 자연스레 양팔과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서
"아─?"
아버지의 출현이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
그대로,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일단 정지. 여기서는 중간의 미묘한 간격이 중요하다. 너무 빨리 말하면 속 보일 테고, 너무 늦게 말하려고 하면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아버지로서도 이 상황이 꽤나 의외였던 듯, 고개를 돌리거나 무슨 말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침묵의 시간이 지난다. 내가 처음에 참고했던 연애 만화에서는 이 경우 '꺄악─! 어딜 보는 거야─!'가 정석이겠지만 이미 나는 그 때의 어리석은 내가 아니다. '19금'의 지식으로 가일층 업그레이드된 나의 두뇌는 그런 비효율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만큼 충분히 성장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녀오셨어요?"
일단 생긋 웃으면서, 샤워기를 든 자세 그대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기서는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감히 태클을 걸 수 없을 정도의 자연스러움으로 심리적 부담을 줄이면 된다!
"응, 다녀왔어."
담담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는 아버지. 그 단정하고 화사한 미소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여기서 시선을 피하면 이도저도 안 된다. 조금 더 당당하게! 그 웃는 얼굴에 대고 나는 마지막 폭탄 선언을 날렸다.
"같이...씻으실래요?"
"그래, 그럴까?"
───에? 답이 너무 빨라?
1초의 간격도 없이, 즉답이 돌아와버렸다.
그리고,
"아아, 살 것 같아..."
"..."
전 살 것 같지 않은데요.
아버지는 전라였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할게. 아버지는 전라였다.
중요한 부분에는 타올을 둘러서 가리기는 했지만, 보통 샤워하고 있는 딸이 있는 욕실로 아무런 주저 없이 웃통 벗고 들어올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보다 피도 안 섞인 의붓딸이라고! 당신은 왜 이렇게 저항감이 없는 거야아아아아아!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쓰던 샤워기를 들어서 몸을 씻고, 내가 쓰던 비누로 비누칠을 하고, 욕조에 들어가서 목욕을 즐긴다.
완성된 남성의 몸이, 눈 앞에 있다.
군살 하나 없는 몸이란 이런 걸 말하는 것 같다. 잡지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멋진 근육질의 몸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쳐진 살도 군살도 하나 없이 발그레하게 혈색이 도는 흰 피부는 건강미를 한껏 발산하고 있고,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붙을 곳에 붙은 탄탄한 근육이 오히려 그 탄력을 더해서...
으아니지금내가뭘보고있는거야게다가뭘그렇게진지하게품평하고있는거야하지만눈앞에있는오빠알몸이알몸이알몸이─!
"저어, 괜찮아? 얼굴이 빨간데, 샤워 너무 오래 하고 있었던 거 아냐?"
"아아아아아아니에요!"
완전히 패닉 상태.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되지? 분명히 세부적인 계획을 이것저것 생각해놨던 것 같은데, 이젠 알몸밖에 눈에 안 들어와─!
"그럼 일단 나와봐, 등 밀어줄테니까."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등이라니니니니니니니.
눈이 빙글빙글 돈다. 마치 끓는 물이 들어간 주전자처럼, 머리 양쪽으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한계치를 넘은 자극에 이미 머리는 쇼트 상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욕조 바깥으로 나와서 앉았고,
차가운 배스 타올의 감촉 너머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프지 않도록 배려한 손길이 최대한 부드럽게, 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상냥함이 얇은 타올 한 장 사이로 그대로 내게 전해진다.
위험해.
몸이 떨리는 거, 들킬 것 같아...
샤워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비누를 씻어낸다. 그는 미지근한 물로 등을 구석구석 씻어주고, 마지막으로 내 머리 위에 그 보드라운 손을 얹고선,
"우리 딸, 너무 예쁜데?"
결정타를 가했다.
'이제 바깥에서 남자애들 조심해야겠다'느니 하는 뒷말을 들을 새도 없이, 나는 온 세상이 꽃밭으로 보이는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눈이 뜨였다.
"괜찮아? 역시 너무 오래 있었나 보구나."
눈 앞에, 아버지의 얼굴이 있다. 환상이 아닌지 확인이라도 해 보듯이 눈을 몇 번 깜박이고, 살짝 고개도 흔들어 봤다. 본인이 맞다.
여긴 내 방, 내 침대 위.
아버지는 침대 옆부분에 걸터앉아서,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는 나를 간호하고 있었다.
"목마르지 않아? 물 떠올까?"
"아뇨!"
금방이라도 일어나려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황급히 대답했다.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핀다.
"어지럽지는 않고?"
"이젠 괜찮아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머릿속에서 조금씩 맥락이 갖추어지자마자, 방금 전에 한 발언에 대한 맹렬한 후회가 밀려온다. 이 바보, 그럴 때는 아무리 멀쩡한 상태더라도 '아직 너무 어지러워요. 곁에 있어주세요'라고 말했어야지!
"아무데도 안 갈 테니까, 손 떼도 돼."
아버지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그러고 보면 방금 전에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을 아직 놓지 않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서 이불 속으로 집어넣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마음 속에서는 다시 한 번 '이 바보' 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하다못해 잘 때까지만이라도 아버지가 곁에 있어줬으면...'
조그마한 소망을 품어봤지만, 아마 무리일 거다. 애초에 잠깐 씻고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어왔을 뿐이고, 금방 나가봐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좀 더 오래 기절해있지 못한 게 아까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잠들 때까진 여기 있을게.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 하지 않아도."
내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보다. 방금 전보다 세 배는 더 부끄러워졌기에, 얼굴이 폭발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이불에 감싸여 보이지는 않았지만, 침대 가장가지에 아버지가 걸터앉는 것을 매트리스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불을 내리지도 못한 채, 두근거리는 가슴의 고동 소리가 들릴까 봐 가슴 위에 양 손을 얹고 뭔가 중요한 것을 숨기듯이 꼬옥 포개었다.
토닥.
아버지의 손이 내 왼쪽 어깨 위에 놓인다. 놀라서 몸을 움찔했지만, 그 따뜻함과 부드러움에 취해서 이내 몸의 긴장이 풀리고 만다.
토닥, 토닥.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듯, 아버지의 손이 고른 간격으로 내 어깨를 토닥인다. 무슨 두서너 살 먹은 애기도 아니고 열세 살 먹은 여자애를 이런 식으로 재우나 싶었지만, 토닥임이 몇 번 계속되자 그 온기에 꽁해 있던 마음도 눈 녹듯 녹아내려 버렸다.
이제는, 작전이든 뭐든 어떻게 되도 좋아.
그저,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이어졌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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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금방 잠이 들었다. 고르게 색색 숨소리를 내고 있는 아이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은 아이를 토닥이던 손을 떼고, 휴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불을 내려 본다. 열세 살짜리 아이의, 마치 천사같은 자는 얼굴.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가 순간 멈칫한다.
고사리같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는다.
"으응..."
잠든 아이의 입에서,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청년은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고는, 옷깃을 잡은 가드다란 손가락을 하나 하나 정성스레 펴 나간다. 이내 잠든 아이의 손이 그의 옷자락에서 떨어져 침대 시트에 조그마한 주름을 만든다.
발소리도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금살금 방을 나선다. 달칵, 문고리가 여닫히는 소리에 그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아이의 자는 얼굴을 바라본다.
위험해.
들킬 것 같아...
닫히는 방문 사이로,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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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키잡 소설. 군대에서 썼던 글인데, 오히려 바깥에서 쓸 때보다 문장기교나 라노베 호흡이 훨씬 더 잘 살아난 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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