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 무색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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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부제밖에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간만에 올리는 글이군요.
소집해제되니까, 좀 정신이 돌아오는 것같습니다.
뭐, 열병이 걸리긴 했지만 ㅇㅇ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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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 무색의 은
“뭐라고?”
은발을 가진 그가 반문했다. 그의 얼굴은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들은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나. 그리고 내가 창조한 나의 자식들은 나를 ‘핵’이라고 칭하네. 자네도 그리 부르게나]
핵의 목소리가 끝나자, 그는 언제 놀랬냐는 듯이 불쾌감으로 가득 채워버렸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이것에 대한 것이나 설명해.”
그가 목소리만 들리는, 핵과 몇 마디를 건네는 사이, 그의 뒤에 서 있던 소녀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분명 처음 들었을 때에는 농담인 줄 알았던 이야기였다.
잊힌 예언.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조차 허황된 전설로 착각하고 있는 그 예언이다.
“모든 것을 ‘멸’하는 힘. 그에 반하는 힘을 가진 네 가지 무기, 그리고 그 주인들.”
그것이 한자리에 모이면…….
파멸될 것이다!
겨울에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날. 어느 해나 하루정도는 꼭 있는 그날이 올해도 찾아왔다. 이런 날이면 입고 있던 두꺼운 코드를 던져버리고 밖에 나와 뛰노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제 이 마을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마수들 덕분에 마을은 황폐해졌다. 그대로 활기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마을에 뿌리내리고 살던 사람들마저 다 떠난 상황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놈들을 피해 도망갈 바에 싸우다 죽겠다!”
라고 외치는 힘이 넘치는 어르신이 하나. 이 마을 토박이이자 은퇴한 퇴마사로서 현재는 남은 사람들의 잘 곳과 먹을거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뭐, 그래서인지 이 마당에 남아있는 퇴마사들이 조금 있었다.
“대략 열 팀 정도 남은 건가?”
“아홉 팀 정도 아닌가?”
“그래도 꽤 남았군. 그렇게 많이 죽어갔는데도 아홉 팀이나 남아있다니 다들 목숨이 서너 개는 되는 모양인가?”
“그러는 우리야말로 목숨 걱정해야하는데 말이지.”
퇴마사들은 기본적으로 용병과 다름없다. 마수는 혼자서 상대하기는 조금 버겁기 때문에 둘에서 많으면 네댓 명이 한 팀을 이뤄서 마수를 사냥한다. 그리고 그 보수로 먹고사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의뢰주인 마을 사람들이 떠난 상황에서도 마을에 남아있었다. 뭐, 남은 자들은 모두 정의감이 투철해서 마수에 의해 망가져버린 마을에서 마수를 내쫓아야된다는 가정을 세우면 만사가 해결되지만, 그것은 정말로 농담이다.
왜 남아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이 마을의 특수성에 기인한 면이 강했다. 마을이 이렇게 변하기 전부터 퇴마사들 사이에서 이곳은 ‘퇴마사의 무덤’ 혹은 ‘마수의 지옥’이라고 불려왔다. 그런 곳에서 오래 살아남을수록, 또는 이곳에서 인정받을수록 유명해졌다. 게다가 이번엔 마수들이 갑자기 증가한데다 고급 마수들마저 흔하게 나오게 변했으니 살아남을 경우의 유명세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것과 별개의 이유를 들자면 ‘측정불가’ 판정을 받은 A급 퇴마사가 넷이나 모였다는 것 정도? 그들에 대한 소문은 거의 루머에 가까울 정도로 허황된 것들이 많아서 실제로 A급 퇴마사 같은 건 없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런데 길드에서 공인하는 A급이 넷이나 모여 있으니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뭐, 그거야 그동안 지내면서 볼 수밖에 없었으니 결국은 자존심에 남아있는 것일 테지만.
“슬슬 시간이 되가네.”
마을 광장에 남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삼일에 한번 오는 마수들의 공격에서 살아남고 나면 한동안은 한가한 시간이 이어졌다. 물론 그동안 다시 싸울 준비를 해야 하니 바쁘면서도 한가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단어겠다.
“주연들은 아직 인가.”
다들 적당히 넓은 원을 만들어가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휴식 시간을 소모해버려도 좋을 정도의 구경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뭐야, 안 나왔네. 설마 도망간 건 아닐 텐데.”
둘러앉은 사람들의 중앙, 즉, 무대 위에 자리 잡고 살짝 폼을 재고 있는 그에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촐랑대는 느낌의 말투와 목소리, 의외로 깔끔해 보이는 금발에 의해 허리에 찬 장검이 장식품처럼 느껴지는 그는, 이 자리의 두 주연 중 하나인 것이다. 평상시와 달리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그에게 농담을 건넬 용자는 없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조금 늦게 나온 은발의 청년은 조용히 무대 위에 올라가 대치하는 것으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서로 모르는 건 아니지만, 시작하기 전에 통성명이나 하지. 난 ‘홍염’의 케시안이다.”
어차피 용병에 가깝다보니 이런 기사의 예는 어차피 의미가 없었다. 다만 싸우는 상대를 확실히 하기 위한 것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그것은 보답 받지 못했다.
“뭐야, 너. 설마 하는데, 쫄은 건 아,”
“불 주제에 말로 싸우는 건가.”
말하다 중간에 뚝 끊긴데다가 저런 말을 듣고도 열 받지 않을 인물은 이 세상에 흔치 않았다. 게다가 그 ‘불’에 열을 더했으니 폭발하는 것은 당연지사.
“네놈!”
케시안의 장검은 뽑히자마자 빠르게 찔러갔다. 케시안의 성격과 달리 깔끔한 발도와 그에 바로 이어지는 찌르기. 게다가 미약하나마 그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화염이 남아있었다.
“역시 ‘홍염’인가. 기사 못지않게 절도가 있는 검술이군.”
“게다가 검신 주변의 불꽃도 꽤 뜨거워 보여.”
언제나 주변에 화염이 있기 때문에 ‘홍염’이라고 불리는 케시안과 달리 케시안의 상대는 그 호칭의 유래를 알 수 없었다. ‘혈루’의 세레인.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신기한 것은 단도로 장검을 막으면서도 밀리질 않는군.”
아직 어느 쪽도 밀리지 않고 중앙에서 치열하게 검을 주고받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장검이 어디를 노리고 베어오든 단도는 슬쩍 다른 곳으로 쳐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공격이 흘려지는 방향을 읽었는지 케시안의 장검은 흘려지는 중에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강하게 휘둘러졌고, 장검과 단도가 한차례 큰 소리를 내며 부딪치더니 둘 다 뒤로 두 발자국정도 물러났다.
“칫. 이걸로는 부족한가.”
케시안은 다시 상단 횡베기를 시도했다. 그것을 피하자 상대의 왼쪽 다리를 노리며 하단 찌르기가 들어갔고, 그 뒤에는 바로 비스듬히 올려베기로 이어졌다. 세레인은 단도로 막아내기엔 조금 힘들었는지 뒤로 피하며 물러섰다.
“혈루의 세레인……, 인가. 하핫. 말도 안 되는 접두어야. 완전히 딴판인걸.”
“누가 붙였는지 난 모른다. 접두어 따윈 쓸데없지.”
세레인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지? 정말로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그가 무척 싫은 것이다. 직접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가 소문으로 들려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무슨 등급이고, 접두어마저 관심조차 안준다는 그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주변에서 자신을 얼마나 떠받드는지도 모르는 그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짜증나! 이게 어디서 기어올라!”
분노가 담긴 외침과 함께 케시안의 장검이 모습을 바꾸었다. 검신이 거대해지더니 오른손목까지 집어삼켜버렸다. 항간에 떠돌던 소문이 사실로써 들어난 순간이었다.
구경하던 자들의 수많은 감탄사와 동시에 케시안은 달려들었다. 그이 칼날 주위에는 아까보다 더욱 강성해진 불꽃이 그의 적을 삼킬 듯이 꽈리를 틀고 있었다.
베었다!
하지만 살을 베는 느낌이 아니었다. 단지 옷조각에 불과했다. 그와 동시에 오른 어깨가 이상해졌다. 익숙한 서늘한 통증과 액체가 흐르는 느낌.
“느려.”
세레인은 먼저 공격을 성공시킨 주제에 웃지도 않았다. 그저 처음 볼 때와 같은 무표정.
“죽여 버리겠어!”
오른 팔을 크게 휘둘러 세레인의 허리를 노렸다. 이번에는 베는 느낌조차 없었다. 하지만 케시안에 노린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단도로 공격을 하려면 매우 근접해야한다. 그 순간 자신의 주위에 엄청난 불길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는 대응할 수 없으리라.
3, 2, 1, 지금!
케시안의 검날이 또다시 변했다. 잠시 오른 팔을 뒤덮더니, 이젠 아예 경갑옷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뿜어내는 화염도 정도를 달리하며 더욱 강렬해졌다. 근처에 있는 나무들에 불씨가 튀었는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근처에 탈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말도 안 되는 불꽃이야. 저거라면 혈루의 세레인이라도 타죽을……."
말을 끝내 잇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는 케시안이 불꽃을 뿜어내는 것보다 더 어이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케시안의 어깨 아래쪽에 또 베인 상처가 생겼다. 그리고 타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세레인은 케시안의 몇 걸음 앞에 멀쩡히 서 있었다. 물론 옷은 여기저기 그을렸지만 말이다.
“도, 도대체…….”
“아, 설명이 필요한가. 이 녀석이 네 검의 영역을 무효화시킨 거다. 이 녀석도 네 검처럼 변하거든. 지난 번 단봉 녀석도 변하는 무기였는데, 아무래도 이 녀석은 그런 무기의 힘을 무효화시키는 모양이더군.”
세레인은 오른 손을 살짝 들었다 내렸다. 그의 손에는 단도도 아니고, 장검도 아닌 어중간한 길이의 도가 잡혀있었다.
“더 할 건가?”
세레인의 질문에 케시안은 넋이 나간 듯 실없이 웃었다. 대답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이미 장검으로 되돌아온 그의 무기가 케시안의 생각을 대신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미 세레인은 등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세레인을 맞아주는 것이 있었다. 물론 맞아주면 당연히 반가워야하지만, 그것이 소리만 지르는 여자애인 것이 문제였다.
“어째서 당신만 돌아온 거죠?”
분명히 이 여자애는, 케시안과 함께 있던 그 애였다.
“왜 대답하지 않죠? 제 말이 말 같지 않은 건가요?”
“조용히 해."
“대답하지 않으면 더 크게 말할 거예요!”
엄청난 고집이었다. 어떻게 이런 애랑 다닐 수 있지?
“모두 공터에 있을 거다.”
소녀는 빠르게 세레인을 지나치더니 문에 손을 대었다.
“멈춰. 문 열지 마.”
“어째서 내가 당신 말을 들어야 하죠?”
“마수들이 문 밖에 있다.”
“그러니까 더욱 가야해요! 케시안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
소녀는 이상하게 다급해보였다. 혹시…….
“그럼 하나만 묻자. 케시안에게도 마수가 이상한 소리를 했나?”
“그걸 어떻게? 잠시만, 그럼 당신도?”
이것으로 더욱 보내줄 수 없게 되었다. 마수는 분명 폐허에서, 그 옛 도시에서 보자고 했었다. 게다가 만나자는 날마저 마수가 다시 공격하는 날!
“폐허에서 보자는 말을 들은 거라면, 지금 그녀석도 그곳으로 갈 거다! 지금 공터로 가다간 엇갈릴지도 몰라.”
세레인은 몸을 돌리며 문을 베었다. 정확히는 부서지기 직전의 문을 확실하게 부서 버린 것이지만. 그는 빠르게 문 앞에 있는 마수들을 정리한 뒤, 폐허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폐허까지 가는 길에는 마수들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폐허에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수십 마리의 마수들, 세레인은 그들 사이를 춤추듯이 돌아다녔다. 양팔에 단도집과 양손에 단도를 들고.
피의 비. 이 단어 밖에는 다른 어떠한 단어로도 이 광경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정도의 피를 본 적은 없는지 뒤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소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세레인이 폐허의 입구에 서 있는 소녀에게 되돌아오자 그 모든 마수들은 바닥에 찢어져 흩뿌려져있었다. 그리고 멀리 그 피의 길을 밟고, 세레인에게 오는 자가 있었다.
“단도의 주인이 오셨군요. 따라오시지요. 그분께서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를 따라가자 광장이 나왔다. 아마 옛 도시의 중앙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세레인이 그 중심에 서자, 그가 돌아섰다. 바로 여기가 약속장소인 것처럼.
[어서 오게. 단도의 주인이여.]
울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자신의 역할이 끝난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째서 나를 부른 거지?”
[뭘 그렇게 급히 묻나. 정 지금 듣고 싶다면 한 가지만 알려주지. 그 단도와 단봉, 장검, 그리고 기형검은 나와 같은 근원일세.]
[아직 이해를 못 했나보군. 그 단도와 나는 같은 근원이자, 상반되는 힘이라네.]
“뭐?”
잊힌 예언 때부터 시간이 흐르지 않던 곳에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나의 자식들을 상대한 후에 오게나.]
그것을 끝으로 ‘핵’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세레인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소녀를 향해 달려드는 마수들과 소녀의 모아진 손에 빛나는 흰색. 그리고 세레인이 서 있던 자리에서부터 피가 뿌려졌다.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두려움. 이제 나도 마수들에게 저렇게 되겠지.
“너, 나에게 정신 속박을 걸었던 거냐?”
소녀의 뒤에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소녀는 세레인이 서 있던 자리를 보았다. 거기에는 마수들의 시체와 그 중심에 세레인이 있었다.
“그따위 것은 안 통해. 허튼 짓 하지 마.”
“다, 당신은 파멸자야! 그러니 여, 여기서 주, 죽이는 게…….”
“내가 단도의 주인이기에 파멸자라면, 케시안도 마찬가지지. 장검의 주인, 녀석도 파멸자다.”
너무 손쉽게 죽어버린 동료들을 보며 두려움에 떨던 - 실제인지 아닌지 몰라도 - 마수들이 다시 밀려들기 시작했다. 태생적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인데다가, 피 내음까지 진동하니 흥분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인 것이다.
털썩. 소녀였다. 몇 마리인지 셀 수조차 없는 마수들이 달려드는 탓에 다리가 풀려버린 것이다. 분명 이대로 싸우면 소녀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제길. 도박인가.”
세레인의 단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왼손을 덮더니 양 팔, 그리고 다시 도의 형태로 변해 왼손에 가지런히 잡혀 있었다. 케시안과 싸울 때도 선보인 그 어중간한 도였다.
“일어날 수 있나?”
“네?”
“일어날 수 있냐고 물었다.”
“아, 네!”
하지만 소녀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별 수 없다고 판단한 세레인은 소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소녀는 세레인의 오른팔을 잡고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이 모습으로 변하면 이 녀석과 비슷한 것들의 힘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듯 해. 아까 그 ‘핵’이란 놈이 같은 근원이라고 해서 한번 시도해 본 거다.”
무효화. 일정 거리 안에 들어온 특정한 힘을 없애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믿기지도 않는 일은 보아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수들이 사라지자, 조금 떨어진 곳에 폐허라는 단어와 맞지 않는 건물이 하나 보였다. 마치 골인 지점이라는 느낌에 세레인과 소녀는 그리로 향하였다.
[어서 오게나. 자네라면 무사히 올 줄 알았다네.]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단봉 녀석이 있었다.
“또 뵙는군요. ‘핵’이 우리 넷에게 할 얘기가 있다는데요. 문제는 이미 두 명은 듣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무슨 뜻이지?”
“기형검의 주인은 죽고, 기형검만 왔다네요. 또, 장검의 주인은 시체로 왔지요.”
그가 가리키는 곳에 케시안이 쓰러져있었다.
“케시안!”
소녀가 케시안의 시체 앞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핵’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의 사인은 정신력의 고갈이라네. 너무 무리한 셈이지.]
케시안의 정신력은 전의 결투에서 심하게 꺾였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자초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럼 본론에 들어갈까? 나와 네 가지 무기, 장검 주염자(主炎子), 기형검 수아자(水兒子), 단봉 기야자(起夜子), 단도 함월자(含月子)는 같은 근원이지. 아, 이것은 말했었던가.]
‘핵’은 의외로 수다쟁이였다. 게다가 횡설수설하는 부분마저 있어서 앞부분은 거의 쓸데없었다.
[결국, 나와 네 가지 무기를 합한 힘은 크기가 같다는 것이지. 써봐서 알겠지만, 그 힘은 인간들이 다루기에는 너무 강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수를 통해 인간들을 전부 멸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힘은 무언가를 멸하는 마이너스적인 힘이었으니 말이네. 물론 네 가지 무기들은 무언가를 생성하는 플러스적인 힘이네.
아, 또, 말이 새버렸군. 아무튼 그것은 실패가 되었네. 퇴마사 덕분이지.
그래서 이번 일이 일어난 거라네. 네 가지 무기를 모아 봉인하려고 말일세.]
“역시 모든 일은 네 가지 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군요. 마수도, 퇴마사도.”
[제대로 이해해줘서 고맙네, 아란프란츠. 봉인을 하면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라네. 나도, 마수도, 퇴마사도. 그렇게 되면 살만해지겠지. 인간들이 말일세.
그래, 동참하겠는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우리를 불러서 설득한 거야 그렇다 쳐도, 동의를 구하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단지 무기만 버리는 것이 아닌 일 같았다. 아무래도 더 중요한 것을 달라는 느낌.
“싫어.”
“싫습니다.”
두 퇴마사의 대답은 같았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아란의 대답 뒤에는 질문도 있다는 점이었다.
“봉인이 끝나면 당신은 어떻게 되나요?”
[내 의지는 사라지겠지. 힘만 무기에 남을 것이고.]
“그럼 더더욱 싫습니다.”
‘핵’은 아란의 대답에 흥미를 느꼈는지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그와는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었다. 그렇기에 그와는 끝내 부딪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세레인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을 보냈을 때와 조금 전의 대화, 그것을 종합하면 그는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자였다. 마수들이 전부 사라지든 말든 그와 관계없는 것은 확실했다.
“무기는 사라지지 않는데, 당신은 사라집니다. 누군가가 그 봉인을 다시 풀 수도 있을 테니, 저라면 여기 있는 자들을 다 죽이겠습니다. 죽어달라는데 순순히 죽어주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네. 봉인이 성공적이라도 자네들이면 충분히 2단계까지 풀 수 있다네. 정신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해제가 되니 말일세.]
“셋 다 이기주의자에요!”
‘핵’의 존재감 때문에 완전히 잊혀져있던 소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물론 ‘핵’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당신들의 이기주의가 마수를 만들었고, 케시안을 죽게 만들었어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지금 되돌릴 기회잖아요!”
“어차피 되돌아가지 않아. 마수가 사라져도 퇴마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수가 없는데, 퇴마사가 남아있을 리가 없어요!”
“세상 물정을 모르는 꼬마 아가씨군.”
“당신 같은 이기주의자보단 나아요!”
끝나지 않을 듯한 논쟁은 ‘핵’이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그만하고 결론을 짓지. 두 주인의 뜻은 잘 알아들었다네. 그리고 아가씨의 뜻도. 그럼 내 멋대로 끝을 내겠네.]
끝. 그것은 결국 실력행사라는 것이다.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요.”
아란의 단봉이 변하기 시작했다. 손을 덮고, 팔을 덮더니, 마지막에는 손목과 발목 밴드가 되어버렸다. 무언가 전투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형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것의 힘은 형태와 연관이 없었다.
“마지막 단계인 4단계에서는 ‘실체화’가 되더라고요.”
아란의 주변에 은창이 솟아나서 사방으로 쏘아졌다. 날아가던 은창 중 일부가 사라지는 것으로 ‘핵’의 위치를 찾아낸 아란은 바닥에서 끝이 뾰족한 은기둥을 세 개나 실체화했다.
[이까짓 걸론 안 된다네.]
‘핵’의 목소리와 동시에 은기둥은 사라졌다.
“세레인 씨와 같은 힘 같군요.”
[아니. 다르다네. 단도의 마지막 힘은 ‘무의 영역’을 생성하는 것이지. 하지만 내 힘은 ‘소멸’이라네. 일정한 영역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가리지 않는다네.]
‘핵’의 말을 증명하는지 그들이 있던 건물의 외벽이 위에서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게다가 속도도 빨랐다.
“세레인 씨!”
“알아!”
이미 단도는 4단계까지의 변신을 마쳤다.
“역시 무린가.”
“세레인 씨도 그런 말을 압니까?”
“너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세레인과 아란, 그리고 소녀가 기대고 있는 부분만이 소멸되지 않았다. 아직 단도의 힘이 ‘핵’을 막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것은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아이린, 넌 네 옆에 있는 문으로 나가라.”
“어떻게 내 이름을?”
소녀는 놀라서 세레인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얼굴을 돌리고 있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어서 나가!”
“어째서? 당신 같은 자가…….”
“이 일이 끝나면, 너 같은 사람이 더 필요할 테니까.”
끝내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말하는 세레인을 보고는 아란이 히죽거렸다.
“역시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하시면 그런 얼굴이 되는 군요. 지금은 사과보다 잘 익,”
“그런 것 말하지 말고, 내보내기나 해!”
괜히 신경질부리는 그를 보며, 한 번 더 웃어준 아란은 아이린을 문 밖으로 내보내버렸다.
“세레인 씨가 저렇게 애원하는데, 나가시지 않으면 곤란하답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지만 말과는 달리 세레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왤까? 단지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너랑 같이 죽게 되다니, 별로군.”
“그런 얼굴로 말하면 신빙성이 떨어집니다만. 뭐, 상관없지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폐허에 있는 것이 이상한 건물도, 아란도, 세레인도, 그들의 무기도, 그리고 ‘핵’과 마수까지도.
단지 폐허에, 무너진 건물만 있는 옛 도시의 광장에 한 소녀만 쓰러져 있었다.
잊힌 예언은 어김없이 시행되었다. 파멸, 그것은 대부분의 어리석인 자들이 생각하던 세계의 파멸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만의 파멸. 분명히 잊힌 예언의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명시되어있다.
- 그들의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필연과 우연이 작용하여, 그들을 끝으로 인도할 것이니 -
내가 이 마지막 구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옛 도시의 광장에서 그녀를 만난 후였다.
“살아계셨군요.”
그녀는 나에게 어릴 적 읽은 동화가 잊힌 예언이란 것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예언을 전부 알려준 것인데, 결국 내가 착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동화의 결말은 파멸자가 힘을 합쳐 세계를 멸망시키려는데, 한 영웅이 나타나 파멸자를 죽인다는 흔한 권선징악의 내용이었다.
“우연이 결말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보러왔어요.”
꼭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알쏭달쏭한 것은 여전했다.
“전 하나의 예언이 끝나면 그것을 글로 남기는 걸 좋아하는데, 혹시 아이린 씨가 해보시지 않을래요?”
그렇게 나는 이 글을 남기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은 그녀의 집에서 머물렀다. 처음 갈 때는 하루 만에 쓰고 나올 예정이었는데,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글 쓰는 것도 처음인데다가, 그녀가 일주일간은 마음정리를 하라며, 종이조차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 쓰려고 하지 말고, 기억나는 부분만 써요.”
그녀가 종이를 내주며, 했던 조언이다. 그 덕인지 아닌지 몰라도, 3주간 쓴 글치고 심하게 짧다고, 아직도 생각한다.
“퇴마사 길드가 해체되었다네요.”
어느 날부터 그녀가 세상 소문을 들어다 전해주었다. 퇴마사 길드의 해체 이후, 세계는 빠르게 달라졌다.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실직한 퇴마사들은 용병이 되거나 도적이 되었다. 물론 모두 그런 게 아니라 대체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인은 늘어난 도적 때문에 용병을 구입하고, 국가에서는 용병을 싼값에 사서 전쟁을 준비한다네요.”
그녀는 이 소식을 전할 때, 우울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세레인이 한 예언과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의 현실을 바라보는 눈은 정확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면 안 된다. 그러면 그가 공격 시도조차 안하면서 나를 살린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가 뻔히 예상한 현실을, 그것을 바꾸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가 이것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말이다.
“우연이 필연을 낳았군요.”
그녀가 내 말을 듣고, 꺼낸 첫 마디였다. 그 후 이어진 말은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가령 올해에 성녀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고 하지요.”
그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경우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올해 태어나는 아이 중에서 성녀가 될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작년까지 성녀가 아닌 여성 중 하나가 올해에 성녀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경우 중에 어느 것이 선택되어질지는, 그것은 우연이다.
“세레인 씨가 만든 ‘우연’이 아이린 씨가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필연’을 만든 것이에요. 아직 이 ‘필연’은 아이린 씨의 삶에만 적용된 ‘필연’이지요.”
각자의 필연과 우연의 조화가 세계에 영향을 주고, 거대한 필연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운명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닌 건가요?”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냐고, 그것을 믿어야 하냐고. 그럼…….
“케시안과 세레인이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일…….”
“이제 와서 이런 말은 쓸데없지만,”
그녀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다른 우연이 작용하여 그곳에 가지 않았거나, ‘핵’이 그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무기의 주인으로서 죽지 않았을 수 있었을 거예요.”
만감이 교차했다.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든 것이 내 탓 같았다. 혼자 살아남은 나의 잘못인 듯만 같이 느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아이린 씨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죠.”
해야, 할 일? 아, 현실을 바꾸기로 하였다. 어떻게든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운명은 완벽하게 맞추어진, 완성된 퍼즐이 아니다.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최선을 다해 내가 말하던 꿈을 현실에 옮겨 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나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끝내고, 그녀의 집을 나갔다.
p.s.
아이린 씨에게
당신의 글에 손을 댔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원래 이건 제 권리였으니 봐주세요.
뭐, 덧붙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짧네요. 하지만, 이 이야기의 모든 인과를 다 적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한다고 해도 별 수 없는 것일 테지요. 그래도 단편적인 부분은 알 것이고, 어차피 이 예언이 실행되었다는 증표에 불과하니까요.
그리고 아이린 씨의 이야기를 뒤에 붙이려다가 말았어요. 아무래도 그것은 따로 적는 게 맞을 듯하네요. 아이린 씨가 성녀가 되어 성십자단을 이끌게 된 것과 자신의 뜻을 거의 이룬 이야기는 매우 길 것 같으니까요.
힘들게 되찾은 평화지만, 언젠가 다시 부서지겠지요.
순수한 내 예상인데, 아무래도 아이린 씨가 이끌고 있는 그들이, 필연과 우연이 만든 도미노의 구슬이 될 것 같아요.
아이린 씨를 생각하면 이 상상이 틀리길 바라지만요.
안타까운 것은 이 추신은 아이린 씨가 못 볼 듯 하다는 점이네요.
이만 여기서 줄일게요.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 -리에-가]
///
p.s.까지가 전부 글입니다.
사실 뭔가 많이 모자라는 부분이 있는데, 추가할 부분을 알려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중간쯤에 확실히 무슨 에피소드를 하나 더 넣고싶은데, 어떤식으로 짤지도 감이 안오네요.
그래서 미완성같은 글을 올립니다.
간만에 올리는 글이군요.
소집해제되니까, 좀 정신이 돌아오는 것같습니다.
뭐, 열병이 걸리긴 했지만 ㅇㅇㅋ
///
무제 - 무색의 은
“뭐라고?”
은발을 가진 그가 반문했다. 그의 얼굴은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들은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나. 그리고 내가 창조한 나의 자식들은 나를 ‘핵’이라고 칭하네. 자네도 그리 부르게나]
핵의 목소리가 끝나자, 그는 언제 놀랬냐는 듯이 불쾌감으로 가득 채워버렸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이것에 대한 것이나 설명해.”
그가 목소리만 들리는, 핵과 몇 마디를 건네는 사이, 그의 뒤에 서 있던 소녀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분명 처음 들었을 때에는 농담인 줄 알았던 이야기였다.
잊힌 예언.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조차 허황된 전설로 착각하고 있는 그 예언이다.
“모든 것을 ‘멸’하는 힘. 그에 반하는 힘을 가진 네 가지 무기, 그리고 그 주인들.”
그것이 한자리에 모이면…….
파멸될 것이다!
겨울에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날. 어느 해나 하루정도는 꼭 있는 그날이 올해도 찾아왔다. 이런 날이면 입고 있던 두꺼운 코드를 던져버리고 밖에 나와 뛰노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제 이 마을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마수들 덕분에 마을은 황폐해졌다. 그대로 활기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마을에 뿌리내리고 살던 사람들마저 다 떠난 상황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놈들을 피해 도망갈 바에 싸우다 죽겠다!”
라고 외치는 힘이 넘치는 어르신이 하나. 이 마을 토박이이자 은퇴한 퇴마사로서 현재는 남은 사람들의 잘 곳과 먹을거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뭐, 그래서인지 이 마당에 남아있는 퇴마사들이 조금 있었다.
“대략 열 팀 정도 남은 건가?”
“아홉 팀 정도 아닌가?”
“그래도 꽤 남았군. 그렇게 많이 죽어갔는데도 아홉 팀이나 남아있다니 다들 목숨이 서너 개는 되는 모양인가?”
“그러는 우리야말로 목숨 걱정해야하는데 말이지.”
퇴마사들은 기본적으로 용병과 다름없다. 마수는 혼자서 상대하기는 조금 버겁기 때문에 둘에서 많으면 네댓 명이 한 팀을 이뤄서 마수를 사냥한다. 그리고 그 보수로 먹고사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의뢰주인 마을 사람들이 떠난 상황에서도 마을에 남아있었다. 뭐, 남은 자들은 모두 정의감이 투철해서 마수에 의해 망가져버린 마을에서 마수를 내쫓아야된다는 가정을 세우면 만사가 해결되지만, 그것은 정말로 농담이다.
왜 남아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이 마을의 특수성에 기인한 면이 강했다. 마을이 이렇게 변하기 전부터 퇴마사들 사이에서 이곳은 ‘퇴마사의 무덤’ 혹은 ‘마수의 지옥’이라고 불려왔다. 그런 곳에서 오래 살아남을수록, 또는 이곳에서 인정받을수록 유명해졌다. 게다가 이번엔 마수들이 갑자기 증가한데다 고급 마수들마저 흔하게 나오게 변했으니 살아남을 경우의 유명세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것과 별개의 이유를 들자면 ‘측정불가’ 판정을 받은 A급 퇴마사가 넷이나 모였다는 것 정도? 그들에 대한 소문은 거의 루머에 가까울 정도로 허황된 것들이 많아서 실제로 A급 퇴마사 같은 건 없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런데 길드에서 공인하는 A급이 넷이나 모여 있으니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뭐, 그거야 그동안 지내면서 볼 수밖에 없었으니 결국은 자존심에 남아있는 것일 테지만.
“슬슬 시간이 되가네.”
마을 광장에 남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삼일에 한번 오는 마수들의 공격에서 살아남고 나면 한동안은 한가한 시간이 이어졌다. 물론 그동안 다시 싸울 준비를 해야 하니 바쁘면서도 한가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단어겠다.
“주연들은 아직 인가.”
다들 적당히 넓은 원을 만들어가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휴식 시간을 소모해버려도 좋을 정도의 구경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뭐야, 안 나왔네. 설마 도망간 건 아닐 텐데.”
둘러앉은 사람들의 중앙, 즉, 무대 위에 자리 잡고 살짝 폼을 재고 있는 그에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촐랑대는 느낌의 말투와 목소리, 의외로 깔끔해 보이는 금발에 의해 허리에 찬 장검이 장식품처럼 느껴지는 그는, 이 자리의 두 주연 중 하나인 것이다. 평상시와 달리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그에게 농담을 건넬 용자는 없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조금 늦게 나온 은발의 청년은 조용히 무대 위에 올라가 대치하는 것으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서로 모르는 건 아니지만, 시작하기 전에 통성명이나 하지. 난 ‘홍염’의 케시안이다.”
어차피 용병에 가깝다보니 이런 기사의 예는 어차피 의미가 없었다. 다만 싸우는 상대를 확실히 하기 위한 것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그것은 보답 받지 못했다.
“뭐야, 너. 설마 하는데, 쫄은 건 아,”
“불 주제에 말로 싸우는 건가.”
말하다 중간에 뚝 끊긴데다가 저런 말을 듣고도 열 받지 않을 인물은 이 세상에 흔치 않았다. 게다가 그 ‘불’에 열을 더했으니 폭발하는 것은 당연지사.
“네놈!”
케시안의 장검은 뽑히자마자 빠르게 찔러갔다. 케시안의 성격과 달리 깔끔한 발도와 그에 바로 이어지는 찌르기. 게다가 미약하나마 그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화염이 남아있었다.
“역시 ‘홍염’인가. 기사 못지않게 절도가 있는 검술이군.”
“게다가 검신 주변의 불꽃도 꽤 뜨거워 보여.”
언제나 주변에 화염이 있기 때문에 ‘홍염’이라고 불리는 케시안과 달리 케시안의 상대는 그 호칭의 유래를 알 수 없었다. ‘혈루’의 세레인.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신기한 것은 단도로 장검을 막으면서도 밀리질 않는군.”
아직 어느 쪽도 밀리지 않고 중앙에서 치열하게 검을 주고받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장검이 어디를 노리고 베어오든 단도는 슬쩍 다른 곳으로 쳐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공격이 흘려지는 방향을 읽었는지 케시안의 장검은 흘려지는 중에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강하게 휘둘러졌고, 장검과 단도가 한차례 큰 소리를 내며 부딪치더니 둘 다 뒤로 두 발자국정도 물러났다.
“칫. 이걸로는 부족한가.”
케시안은 다시 상단 횡베기를 시도했다. 그것을 피하자 상대의 왼쪽 다리를 노리며 하단 찌르기가 들어갔고, 그 뒤에는 바로 비스듬히 올려베기로 이어졌다. 세레인은 단도로 막아내기엔 조금 힘들었는지 뒤로 피하며 물러섰다.
“혈루의 세레인……, 인가. 하핫. 말도 안 되는 접두어야. 완전히 딴판인걸.”
“누가 붙였는지 난 모른다. 접두어 따윈 쓸데없지.”
세레인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지? 정말로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그가 무척 싫은 것이다. 직접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가 소문으로 들려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무슨 등급이고, 접두어마저 관심조차 안준다는 그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주변에서 자신을 얼마나 떠받드는지도 모르는 그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짜증나! 이게 어디서 기어올라!”
분노가 담긴 외침과 함께 케시안의 장검이 모습을 바꾸었다. 검신이 거대해지더니 오른손목까지 집어삼켜버렸다. 항간에 떠돌던 소문이 사실로써 들어난 순간이었다.
구경하던 자들의 수많은 감탄사와 동시에 케시안은 달려들었다. 그이 칼날 주위에는 아까보다 더욱 강성해진 불꽃이 그의 적을 삼킬 듯이 꽈리를 틀고 있었다.
베었다!
하지만 살을 베는 느낌이 아니었다. 단지 옷조각에 불과했다. 그와 동시에 오른 어깨가 이상해졌다. 익숙한 서늘한 통증과 액체가 흐르는 느낌.
“느려.”
세레인은 먼저 공격을 성공시킨 주제에 웃지도 않았다. 그저 처음 볼 때와 같은 무표정.
“죽여 버리겠어!”
오른 팔을 크게 휘둘러 세레인의 허리를 노렸다. 이번에는 베는 느낌조차 없었다. 하지만 케시안에 노린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단도로 공격을 하려면 매우 근접해야한다. 그 순간 자신의 주위에 엄청난 불길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는 대응할 수 없으리라.
3, 2, 1, 지금!
케시안의 검날이 또다시 변했다. 잠시 오른 팔을 뒤덮더니, 이젠 아예 경갑옷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뿜어내는 화염도 정도를 달리하며 더욱 강렬해졌다. 근처에 있는 나무들에 불씨가 튀었는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근처에 탈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말도 안 되는 불꽃이야. 저거라면 혈루의 세레인이라도 타죽을……."
말을 끝내 잇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는 케시안이 불꽃을 뿜어내는 것보다 더 어이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케시안의 어깨 아래쪽에 또 베인 상처가 생겼다. 그리고 타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세레인은 케시안의 몇 걸음 앞에 멀쩡히 서 있었다. 물론 옷은 여기저기 그을렸지만 말이다.
“도, 도대체…….”
“아, 설명이 필요한가. 이 녀석이 네 검의 영역을 무효화시킨 거다. 이 녀석도 네 검처럼 변하거든. 지난 번 단봉 녀석도 변하는 무기였는데, 아무래도 이 녀석은 그런 무기의 힘을 무효화시키는 모양이더군.”
세레인은 오른 손을 살짝 들었다 내렸다. 그의 손에는 단도도 아니고, 장검도 아닌 어중간한 길이의 도가 잡혀있었다.
“더 할 건가?”
세레인의 질문에 케시안은 넋이 나간 듯 실없이 웃었다. 대답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이미 장검으로 되돌아온 그의 무기가 케시안의 생각을 대신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미 세레인은 등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세레인을 맞아주는 것이 있었다. 물론 맞아주면 당연히 반가워야하지만, 그것이 소리만 지르는 여자애인 것이 문제였다.
“어째서 당신만 돌아온 거죠?”
분명히 이 여자애는, 케시안과 함께 있던 그 애였다.
“왜 대답하지 않죠? 제 말이 말 같지 않은 건가요?”
“조용히 해."
“대답하지 않으면 더 크게 말할 거예요!”
엄청난 고집이었다. 어떻게 이런 애랑 다닐 수 있지?
“모두 공터에 있을 거다.”
소녀는 빠르게 세레인을 지나치더니 문에 손을 대었다.
“멈춰. 문 열지 마.”
“어째서 내가 당신 말을 들어야 하죠?”
“마수들이 문 밖에 있다.”
“그러니까 더욱 가야해요! 케시안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
소녀는 이상하게 다급해보였다. 혹시…….
“그럼 하나만 묻자. 케시안에게도 마수가 이상한 소리를 했나?”
“그걸 어떻게? 잠시만, 그럼 당신도?”
이것으로 더욱 보내줄 수 없게 되었다. 마수는 분명 폐허에서, 그 옛 도시에서 보자고 했었다. 게다가 만나자는 날마저 마수가 다시 공격하는 날!
“폐허에서 보자는 말을 들은 거라면, 지금 그녀석도 그곳으로 갈 거다! 지금 공터로 가다간 엇갈릴지도 몰라.”
세레인은 몸을 돌리며 문을 베었다. 정확히는 부서지기 직전의 문을 확실하게 부서 버린 것이지만. 그는 빠르게 문 앞에 있는 마수들을 정리한 뒤, 폐허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폐허까지 가는 길에는 마수들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폐허에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수십 마리의 마수들, 세레인은 그들 사이를 춤추듯이 돌아다녔다. 양팔에 단도집과 양손에 단도를 들고.
피의 비. 이 단어 밖에는 다른 어떠한 단어로도 이 광경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정도의 피를 본 적은 없는지 뒤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소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세레인이 폐허의 입구에 서 있는 소녀에게 되돌아오자 그 모든 마수들은 바닥에 찢어져 흩뿌려져있었다. 그리고 멀리 그 피의 길을 밟고, 세레인에게 오는 자가 있었다.
“단도의 주인이 오셨군요. 따라오시지요. 그분께서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를 따라가자 광장이 나왔다. 아마 옛 도시의 중앙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세레인이 그 중심에 서자, 그가 돌아섰다. 바로 여기가 약속장소인 것처럼.
[어서 오게. 단도의 주인이여.]
울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자신의 역할이 끝난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째서 나를 부른 거지?”
[뭘 그렇게 급히 묻나. 정 지금 듣고 싶다면 한 가지만 알려주지. 그 단도와 단봉, 장검, 그리고 기형검은 나와 같은 근원일세.]
[아직 이해를 못 했나보군. 그 단도와 나는 같은 근원이자, 상반되는 힘이라네.]
“뭐?”
잊힌 예언 때부터 시간이 흐르지 않던 곳에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나의 자식들을 상대한 후에 오게나.]
그것을 끝으로 ‘핵’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세레인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소녀를 향해 달려드는 마수들과 소녀의 모아진 손에 빛나는 흰색. 그리고 세레인이 서 있던 자리에서부터 피가 뿌려졌다.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두려움. 이제 나도 마수들에게 저렇게 되겠지.
“너, 나에게 정신 속박을 걸었던 거냐?”
소녀의 뒤에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소녀는 세레인이 서 있던 자리를 보았다. 거기에는 마수들의 시체와 그 중심에 세레인이 있었다.
“그따위 것은 안 통해. 허튼 짓 하지 마.”
“다, 당신은 파멸자야! 그러니 여, 여기서 주, 죽이는 게…….”
“내가 단도의 주인이기에 파멸자라면, 케시안도 마찬가지지. 장검의 주인, 녀석도 파멸자다.”
너무 손쉽게 죽어버린 동료들을 보며 두려움에 떨던 - 실제인지 아닌지 몰라도 - 마수들이 다시 밀려들기 시작했다. 태생적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인데다가, 피 내음까지 진동하니 흥분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인 것이다.
털썩. 소녀였다. 몇 마리인지 셀 수조차 없는 마수들이 달려드는 탓에 다리가 풀려버린 것이다. 분명 이대로 싸우면 소녀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제길. 도박인가.”
세레인의 단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왼손을 덮더니 양 팔, 그리고 다시 도의 형태로 변해 왼손에 가지런히 잡혀 있었다. 케시안과 싸울 때도 선보인 그 어중간한 도였다.
“일어날 수 있나?”
“네?”
“일어날 수 있냐고 물었다.”
“아, 네!”
하지만 소녀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별 수 없다고 판단한 세레인은 소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소녀는 세레인의 오른팔을 잡고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이 모습으로 변하면 이 녀석과 비슷한 것들의 힘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듯 해. 아까 그 ‘핵’이란 놈이 같은 근원이라고 해서 한번 시도해 본 거다.”
무효화. 일정 거리 안에 들어온 특정한 힘을 없애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믿기지도 않는 일은 보아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수들이 사라지자, 조금 떨어진 곳에 폐허라는 단어와 맞지 않는 건물이 하나 보였다. 마치 골인 지점이라는 느낌에 세레인과 소녀는 그리로 향하였다.
[어서 오게나. 자네라면 무사히 올 줄 알았다네.]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단봉 녀석이 있었다.
“또 뵙는군요. ‘핵’이 우리 넷에게 할 얘기가 있다는데요. 문제는 이미 두 명은 듣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무슨 뜻이지?”
“기형검의 주인은 죽고, 기형검만 왔다네요. 또, 장검의 주인은 시체로 왔지요.”
그가 가리키는 곳에 케시안이 쓰러져있었다.
“케시안!”
소녀가 케시안의 시체 앞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핵’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의 사인은 정신력의 고갈이라네. 너무 무리한 셈이지.]
케시안의 정신력은 전의 결투에서 심하게 꺾였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자초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럼 본론에 들어갈까? 나와 네 가지 무기, 장검 주염자(主炎子), 기형검 수아자(水兒子), 단봉 기야자(起夜子), 단도 함월자(含月子)는 같은 근원이지. 아, 이것은 말했었던가.]
‘핵’은 의외로 수다쟁이였다. 게다가 횡설수설하는 부분마저 있어서 앞부분은 거의 쓸데없었다.
[결국, 나와 네 가지 무기를 합한 힘은 크기가 같다는 것이지. 써봐서 알겠지만, 그 힘은 인간들이 다루기에는 너무 강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수를 통해 인간들을 전부 멸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힘은 무언가를 멸하는 마이너스적인 힘이었으니 말이네. 물론 네 가지 무기들은 무언가를 생성하는 플러스적인 힘이네.
아, 또, 말이 새버렸군. 아무튼 그것은 실패가 되었네. 퇴마사 덕분이지.
그래서 이번 일이 일어난 거라네. 네 가지 무기를 모아 봉인하려고 말일세.]
“역시 모든 일은 네 가지 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군요. 마수도, 퇴마사도.”
[제대로 이해해줘서 고맙네, 아란프란츠. 봉인을 하면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라네. 나도, 마수도, 퇴마사도. 그렇게 되면 살만해지겠지. 인간들이 말일세.
그래, 동참하겠는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우리를 불러서 설득한 거야 그렇다 쳐도, 동의를 구하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단지 무기만 버리는 것이 아닌 일 같았다. 아무래도 더 중요한 것을 달라는 느낌.
“싫어.”
“싫습니다.”
두 퇴마사의 대답은 같았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아란의 대답 뒤에는 질문도 있다는 점이었다.
“봉인이 끝나면 당신은 어떻게 되나요?”
[내 의지는 사라지겠지. 힘만 무기에 남을 것이고.]
“그럼 더더욱 싫습니다.”
‘핵’은 아란의 대답에 흥미를 느꼈는지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그와는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었다. 그렇기에 그와는 끝내 부딪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세레인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을 보냈을 때와 조금 전의 대화, 그것을 종합하면 그는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자였다. 마수들이 전부 사라지든 말든 그와 관계없는 것은 확실했다.
“무기는 사라지지 않는데, 당신은 사라집니다. 누군가가 그 봉인을 다시 풀 수도 있을 테니, 저라면 여기 있는 자들을 다 죽이겠습니다. 죽어달라는데 순순히 죽어주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네. 봉인이 성공적이라도 자네들이면 충분히 2단계까지 풀 수 있다네. 정신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해제가 되니 말일세.]
“셋 다 이기주의자에요!”
‘핵’의 존재감 때문에 완전히 잊혀져있던 소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물론 ‘핵’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당신들의 이기주의가 마수를 만들었고, 케시안을 죽게 만들었어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지금 되돌릴 기회잖아요!”
“어차피 되돌아가지 않아. 마수가 사라져도 퇴마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수가 없는데, 퇴마사가 남아있을 리가 없어요!”
“세상 물정을 모르는 꼬마 아가씨군.”
“당신 같은 이기주의자보단 나아요!”
끝나지 않을 듯한 논쟁은 ‘핵’이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그만하고 결론을 짓지. 두 주인의 뜻은 잘 알아들었다네. 그리고 아가씨의 뜻도. 그럼 내 멋대로 끝을 내겠네.]
끝. 그것은 결국 실력행사라는 것이다.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요.”
아란의 단봉이 변하기 시작했다. 손을 덮고, 팔을 덮더니, 마지막에는 손목과 발목 밴드가 되어버렸다. 무언가 전투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형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것의 힘은 형태와 연관이 없었다.
“마지막 단계인 4단계에서는 ‘실체화’가 되더라고요.”
아란의 주변에 은창이 솟아나서 사방으로 쏘아졌다. 날아가던 은창 중 일부가 사라지는 것으로 ‘핵’의 위치를 찾아낸 아란은 바닥에서 끝이 뾰족한 은기둥을 세 개나 실체화했다.
[이까짓 걸론 안 된다네.]
‘핵’의 목소리와 동시에 은기둥은 사라졌다.
“세레인 씨와 같은 힘 같군요.”
[아니. 다르다네. 단도의 마지막 힘은 ‘무의 영역’을 생성하는 것이지. 하지만 내 힘은 ‘소멸’이라네. 일정한 영역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가리지 않는다네.]
‘핵’의 말을 증명하는지 그들이 있던 건물의 외벽이 위에서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게다가 속도도 빨랐다.
“세레인 씨!”
“알아!”
이미 단도는 4단계까지의 변신을 마쳤다.
“역시 무린가.”
“세레인 씨도 그런 말을 압니까?”
“너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세레인과 아란, 그리고 소녀가 기대고 있는 부분만이 소멸되지 않았다. 아직 단도의 힘이 ‘핵’을 막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것은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아이린, 넌 네 옆에 있는 문으로 나가라.”
“어떻게 내 이름을?”
소녀는 놀라서 세레인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얼굴을 돌리고 있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어서 나가!”
“어째서? 당신 같은 자가…….”
“이 일이 끝나면, 너 같은 사람이 더 필요할 테니까.”
끝내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말하는 세레인을 보고는 아란이 히죽거렸다.
“역시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하시면 그런 얼굴이 되는 군요. 지금은 사과보다 잘 익,”
“그런 것 말하지 말고, 내보내기나 해!”
괜히 신경질부리는 그를 보며, 한 번 더 웃어준 아란은 아이린을 문 밖으로 내보내버렸다.
“세레인 씨가 저렇게 애원하는데, 나가시지 않으면 곤란하답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지만 말과는 달리 세레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왤까? 단지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너랑 같이 죽게 되다니, 별로군.”
“그런 얼굴로 말하면 신빙성이 떨어집니다만. 뭐, 상관없지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폐허에 있는 것이 이상한 건물도, 아란도, 세레인도, 그들의 무기도, 그리고 ‘핵’과 마수까지도.
단지 폐허에, 무너진 건물만 있는 옛 도시의 광장에 한 소녀만 쓰러져 있었다.
잊힌 예언은 어김없이 시행되었다. 파멸, 그것은 대부분의 어리석인 자들이 생각하던 세계의 파멸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만의 파멸. 분명히 잊힌 예언의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명시되어있다.
- 그들의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필연과 우연이 작용하여, 그들을 끝으로 인도할 것이니 -
내가 이 마지막 구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옛 도시의 광장에서 그녀를 만난 후였다.
“살아계셨군요.”
그녀는 나에게 어릴 적 읽은 동화가 잊힌 예언이란 것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예언을 전부 알려준 것인데, 결국 내가 착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동화의 결말은 파멸자가 힘을 합쳐 세계를 멸망시키려는데, 한 영웅이 나타나 파멸자를 죽인다는 흔한 권선징악의 내용이었다.
“우연이 결말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보러왔어요.”
꼭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알쏭달쏭한 것은 여전했다.
“전 하나의 예언이 끝나면 그것을 글로 남기는 걸 좋아하는데, 혹시 아이린 씨가 해보시지 않을래요?”
그렇게 나는 이 글을 남기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은 그녀의 집에서 머물렀다. 처음 갈 때는 하루 만에 쓰고 나올 예정이었는데,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글 쓰는 것도 처음인데다가, 그녀가 일주일간은 마음정리를 하라며, 종이조차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 쓰려고 하지 말고, 기억나는 부분만 써요.”
그녀가 종이를 내주며, 했던 조언이다. 그 덕인지 아닌지 몰라도, 3주간 쓴 글치고 심하게 짧다고, 아직도 생각한다.
“퇴마사 길드가 해체되었다네요.”
어느 날부터 그녀가 세상 소문을 들어다 전해주었다. 퇴마사 길드의 해체 이후, 세계는 빠르게 달라졌다.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실직한 퇴마사들은 용병이 되거나 도적이 되었다. 물론 모두 그런 게 아니라 대체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인은 늘어난 도적 때문에 용병을 구입하고, 국가에서는 용병을 싼값에 사서 전쟁을 준비한다네요.”
그녀는 이 소식을 전할 때, 우울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세레인이 한 예언과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의 현실을 바라보는 눈은 정확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면 안 된다. 그러면 그가 공격 시도조차 안하면서 나를 살린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가 뻔히 예상한 현실을, 그것을 바꾸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가 이것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말이다.
“우연이 필연을 낳았군요.”
그녀가 내 말을 듣고, 꺼낸 첫 마디였다. 그 후 이어진 말은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가령 올해에 성녀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고 하지요.”
그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경우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올해 태어나는 아이 중에서 성녀가 될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작년까지 성녀가 아닌 여성 중 하나가 올해에 성녀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경우 중에 어느 것이 선택되어질지는, 그것은 우연이다.
“세레인 씨가 만든 ‘우연’이 아이린 씨가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필연’을 만든 것이에요. 아직 이 ‘필연’은 아이린 씨의 삶에만 적용된 ‘필연’이지요.”
각자의 필연과 우연의 조화가 세계에 영향을 주고, 거대한 필연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운명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닌 건가요?”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냐고, 그것을 믿어야 하냐고. 그럼…….
“케시안과 세레인이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일…….”
“이제 와서 이런 말은 쓸데없지만,”
그녀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다른 우연이 작용하여 그곳에 가지 않았거나, ‘핵’이 그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무기의 주인으로서 죽지 않았을 수 있었을 거예요.”
만감이 교차했다.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든 것이 내 탓 같았다. 혼자 살아남은 나의 잘못인 듯만 같이 느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아이린 씨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죠.”
해야, 할 일? 아, 현실을 바꾸기로 하였다. 어떻게든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운명은 완벽하게 맞추어진, 완성된 퍼즐이 아니다.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최선을 다해 내가 말하던 꿈을 현실에 옮겨 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나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끝내고, 그녀의 집을 나갔다.
p.s.
아이린 씨에게
당신의 글에 손을 댔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원래 이건 제 권리였으니 봐주세요.
뭐, 덧붙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짧네요. 하지만, 이 이야기의 모든 인과를 다 적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한다고 해도 별 수 없는 것일 테지요. 그래도 단편적인 부분은 알 것이고, 어차피 이 예언이 실행되었다는 증표에 불과하니까요.
그리고 아이린 씨의 이야기를 뒤에 붙이려다가 말았어요. 아무래도 그것은 따로 적는 게 맞을 듯하네요. 아이린 씨가 성녀가 되어 성십자단을 이끌게 된 것과 자신의 뜻을 거의 이룬 이야기는 매우 길 것 같으니까요.
힘들게 되찾은 평화지만, 언젠가 다시 부서지겠지요.
순수한 내 예상인데, 아무래도 아이린 씨가 이끌고 있는 그들이, 필연과 우연이 만든 도미노의 구슬이 될 것 같아요.
아이린 씨를 생각하면 이 상상이 틀리길 바라지만요.
안타까운 것은 이 추신은 아이린 씨가 못 볼 듯 하다는 점이네요.
이만 여기서 줄일게요.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 -리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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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까지가 전부 글입니다.
사실 뭔가 많이 모자라는 부분이 있는데, 추가할 부분을 알려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중간쯤에 확실히 무슨 에피소드를 하나 더 넣고싶은데, 어떤식으로 짤지도 감이 안오네요.
그래서 미완성같은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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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주신킨진님의 댓글
최강주신킨진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요즘 맘데로 풀리지가 않는 일이 많아서 그림을 그린다거나 소설을 쓴다거나 창작활동에 다시 관심이 가는데 전부터 알던 심리학자한테 컨설팅 받아보니 창작활동이 나같은 부류의 사람들한테는 작게는 스스로가 속한 직장과도 같은 그룹이나 국가 및 세계 등이 될 수 있는 특정한 사회 구조 안에서 모든 것을 독재하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라던데... ㄱ-; 이런 말까지 들어가면서 한다고 해봐야 현재 받고 있는 심리적 압박에 대한 약간의 해소 정도 뿐이라; 어찌해야될까? 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