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그럼, 시간을 죽여줘┃ζ 無,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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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번에는 현실의 배경을 가미한 판타지입니다.
재료로는 판타지 특유의 세계를 넣되 양념은 현실에서 나타는 사회상에 대한 비판으로 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다만 직접적인 비판은 안할 예정. 꾸벅,[퍼어어억]
14일에 올렸다가 삭제했던 것을 수정해서 다시 올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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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간을 죽여줘
- 당신의 존재는 세상을 파괴합니다. 그래도 존재할 건가요? -
- 그녀의 四界 0┃ζ 無, Prolouge -
= 1 =
나는 떨어진다.
이런 느낌, 대체 뭘까?
이건 기분 나쁜 꿈일까.
아니면 끝없이 낙차하고 있는 자이로드롭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기권을 뚫고 힘차게 지구로 환향하는 우주선일까.
아니잖아, 이런 느낌은.
이 느낌, 그래,
다 알고 있는데 뭘 망설이고 있는 걸까.
[치이이익]
들려. 뇌수를 쏟아내는 잿빛 잡음이, 정말 잘 들려.
나는 추락하는 경비행기에 가족들과 함께 몸을 맡기고 있다. 앞 좌석 너머로 아빠, 엄마의 당황한 표정이 위성사정 안 좋은 축구 중계방송처럼 끊기며 전해진다. 그 표정 속에서도 나는 떨어지며 내 시야는 한없이 펼쳐지는 푸른 하늘이 태풍에 휘몰리듯 흔들린다. 안테나를 잘못 건드린 TV 속에 아빠하고 엄마가 있기라도 하는 걸까. 도대체, 왜 점점 안 보이는 거야, 왜 점점 흐려지는 거야, 보고 싶은데, 더 보고 싶은데.
나는 아빠의 거친 턱수염과,
레드 로즈 향기를 내는 어머니의 머릿결에서 떨어진다.
가지마, 가지 말아요. 딸이 있잖아요,
왜 먼저 가요,
가지 마세요,
저 혼자 남으면 어떻게 살아요,
그래도 괜찮다고요?
뭐가 괜찮,
“유키양, 도서잔고 정리 안하나? 오늘 신간잡지가 대거 입하되는 날인거 알지?”
난데 없는 사람의 음성에 눈을 뜬 내 시야에 펼쳐진 것은 부모님의 모습이 아니라 이상한 아저씨의 모습. 아, 또 꿈꾼거구나. 이 꿈은 왜 늘 결말이 이런식일까, 기분 나쁘게. 이렇게 갑자기 이상한 세계로 빠져드는 판타스틱 꿈 같은 거, 나는 안 바란다. 꿈이라도 현실적인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런 꿈은 오늘 하루 일진이 재수없다는 예언과도 다름없다.
“잔고라니요...? 어제 다 정리했던걸로.... 저기, 토요일인데도 그런거 꼭 해야하나요?”
그래도 이렇게 기분 나쁜 꿈이라도 꿈은 꿈이기에 누군가가 훼방내버리면 나로써는 심히 불쾌할 수 밖에 없다. 왜 남의 단잠을 깨우는거냐고. 나쁘다, 나쁜 아저씨. 이런 아저씨가 무슨 수로 국회의원들에게 좋은 점수를 따서 도서관 관리장이라는 요직에 앉아있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
“이 잡지들을 갖다 버리든지 가지든지 알아서 처리해주게.”
약간의 거드름을 더한 언행과 함께 도서관리장 아저씨가 내보인 옆 책상의 수북한 잡지들. 이, 이 잡지는 설마,
“하하하하, 상도동 할아버지의 에로 스페셜 콜렉션이지!”
그렇다. 한 사람이 몇 년을 걸쳐 수집한 에로 잡지.
아니, 왜 이런 성인 잡지가 도서관에 있는 거냐고. 게다가 소녀인 내 앞에서 이런 걸 보여줘도 되는 겁니까.
“뭘 어떻게 하란 거죠?”
“그냥 갖다 버리란 말이지, 여자가 들기에는 조금 많은가?”
족히 100권은 넘어보일 것으로 보이는 막대한 양. 상도동 할아버지,잊고 싶어도 못 잊는다. 한 사람의 요구로 건전한 도서관에 성인잡지를 들이게 된 일부터 시작해서 내 엉덩이를 건드려놓고도 모른척하는 교활한 눈빛까지, 그 할아버지가 인류에 펼친 악덕들은 내 기억에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그 할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악덕들은 전파되지 않을 것, 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아저씨, 이걸 나보고 버리라고? 음...
역시 이런 짓은 싫어!
“저는 여자에요, 이런 야리꾸리한 잡지들을 세트로 묶어서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ㅡ여기는 적당히 애교를 넣는 것이 포인트ㅡ
아아아아앙~ 아저씨, 너무해요.”
“하하하하, 그런가. 대신 이 잡지를 버리고 오면 특별한거 하나를 주지.”
남자는 애교에 약하다, 이것이 내 인생의 철학! 다만 이 아저씨도 상당한 실력이다. 당근과 채찍 전술이란 말인가. 으음, 상도동 할아버지와 이 아저씨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 궁금한데.
“예에, 알겠어요. 옆에 폐품장에 버리면 되는 거죠.”
“그런데 너네 학교 친구들한테 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니? 청춘의 정열이라게 있는 법인데.”
주기는 뭘 줘, 이런 에로 잡지따위 그냥 버려버리겠어.
“저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그건 그렇고요, 특별히 준다는 게 뭐죠?”
뭘 준다고 하니 은근히 기대... 아니 기대하지 않는다.
“먼저 가서 쉬라고.”
이런 바보같으니! 먼저 퇴근하고 싶었으면 진작에 내가 알아서 가버렸단 말이다. 아저씨가 상관할게 아니란 말이야. 뭐, 그래도 가서 쉬라고 말하니 고맙기는 하다.
문제는 이런 잡지를 어떻게 몰래 버리냐는 건데... 잘못보이면 박스로 에로 잡지를 수집하는 변태 여학생으로 찍힐 수 있는 탓에 빠른 시간 내에 이걸 처리해야 한다. 에로잡지들이 꽤나 무거운지라 현관으로 끌고 가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청객은 가까스로 내가 현관문 턱을 넘겼을 때쯤 공격을 시도했다.
“도서 대출은 어디서 하나요?”
무슨 소리야, 도서 대출? 그냥 이 에로잡지나 가지고 가라. 꽁짜야, 꽁짜.
“크으으음, 아... 뭐라고 하셨죠?”
“도서 대출, 어디서 하냐구요. 저기, 설마 외국인이신가요?”
두근두근, 글쎄 어디서 하더라.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떡하지.
“1층 카운터에서 등록하시고 대출 받으시면 되는데요.”
오오오오, 내 입이 알아서 말을 다 해주네. 이런 고마울데가. 나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임기응변을 하는 자신을 보며 들뜬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아니, 그런데 남자면 이렇게 낑껑거리며 짐을 옮기는 소녀가 있으면 도와주어야 되는게 예의다. 처량한 소녀의 모습을 보면 도와주어야지 말이야. 이건 레이디퍼스트도 아니고 레이디라스트잖아. 그건 그렇고 이 남자, 뭐라고 했지. 뭐어, 외국인?
이 사람, 내가 혼혈인이라는것이 불만인거야. 머리색만 보고서 외국인이라고 판단해버리다니. 이래서 한국땅에서는 혼혈인이 살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냥 일반적인 한국인이 노랑머리로 물들었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나. 이 도서관에서 외국인이냐는 소리 들은게 요번으로 몇 번 째인지, 짜증나게.
어찌 되었든 간에 결론적으로 폐품장 한 쪽에 저속한 물건들이 들어있는 종이박스 몇 개가 추가되었다. 할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예를 표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저벅저벅, 두 발을 가지는 동물들이 하는 직립보행을 나 자신도 한다. 이 도서관에서 우리 집은 결코 먼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직선거리의 경우로써 실제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길을 이용한다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 바퀴를 빙 돌아야한다. 이로 인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줄이기 위해 나는 도서관-집간의 새로운 루트를 발견했는데 다름 아닌 그 루트란 집집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내 나름대로의 통로이다. 사람 없고, 폭 좁고, 먼지 다분한 이 루트가 맘에 들 턱이 없지만 시간 낭비하는 건 질색이니까 이용할 수 밖에.
콜록콜록, 인적이 닿지 않은 길의 먼지가 발에 채이며 내 기관지를 공격할 때의 기분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이 루트를 이용해본 사람만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햇빛이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이 루트에 먼지가 얼마나 많이 숨어있을 지는... 정말,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이 길에 보도 좀 설치하라고 집사에게 말해봐야지, 이왕이면 확장공사도 조금 하고, 이렇게 어두워서야. 컬록콜록.
[치이이익]
재채기가 나왔던 바로 그 때, 누군가가 내가 걷고 있는 이 루트를 장악했다. 그와 함께 내 귀에 걸리는 전자음의 잡티.
[치이이익]
“너가 이유키에델린인가?”
ㅡ너가 이유키에델린인가ㅡ
사람, 내 앞을 채운 어두운 물체의 실체는 검은 가죽점퍼를 입은 육중한 사내의 그림자. 그 그림자는 옷깃을 휘날리며 내 이름 여섯 자를 물었다.
그 느낌이야.
바로 그 느낌. 꿈에서만 느낄 수 있던 잿빛 잡음. 당신은,
ㅡ누굴까ㅡ
“대답이 없다면 너가 이유키에델린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무엇보다 유키에델린양, 놀랐다. 보통 인적과 소음은 비례하는게 정상이건만, 도서관같은 장소를 선택할 줄이야. 이러면 마법사 입장에서 나서기가 얼마나 껄끄러운지 아는가?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써 목격자를 만들기 쉬운 장소, 조그마한 소리도 잡아냄으로써 침입을 감지할 수 있는 장소. 도서관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한 장소였다. 확실히 유키에델린양의 요번 은신처는 좋았다. 다만, 그래봤자 너가 지금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꺼내든다.
“호오, 카타나인가? 한국에서 일본도를 보게 될 줄이야.”
나에게 응수하듯 이 남자도 손을 올리더니,
“하지만 칼의 시대는 갔다!”
[슈으으으으]
그 손에 화염이 불어난다. 그것은 내 숨결을 끊기 위한 것.
ㅡ알겠어, 당신이 누구인지.ㅡ
유키에델린, 마음을 굳게 먹자. 나도 싸워야 해.
유키에델린, 또 하나의 세계를 펼치는 것이다. 그러자 갖가지 물체 위에 이 세계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수직선이 그려진다.
“세계의 질서를 위해서 사라지거라, 유키에델린.”
그리자! 그리자! 그리자! 이 전혀 다른 세계의 수직선에 내 카타나로 곡선을 그리는 거야. 곧 화염이 내 몸을 삼키더라도 괜찮아.
카타나의 날 끝을 따라 그려진 곡선은 청아하게 화염의 구체 위에 수직으로 그려진 하나의 선을 잘라낸다.
[쉬이익]
더 이상 화염의 구체는 달려들지 않는다. 다만 뉴턴 역학의 순리에 맞지 않은 운동법칙을 가지며 기어들 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파이어볼의 시간은 주위의 그것보다 10배는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파이어볼이 느려지다니! 무슨 마법인거냐!”
마법? 아니야. 이런 걸로 놀라지 마.
이 정도로, 놀라?
당신은, 두려워?
시간이 들어맞지 않는 이 광경이 놀라워?
나는 수 백번, 수 천번 이런 광경을 보고 있는데.
놀란만한 시간, 당신에게는 줄 수 없어. 나는 당신을 죽여야 하니까.
한번 더 수직선을 잘라낸다.
“어...떠...엇...케...”
카타나의 등에 비친 햇살이 투영된 나의 각막에 그 남자는 슬로우모드의 리플레이비디오.
3초의 시간을 줄 것이다. 이것이 곧 세상과 작별하게 될 가녀린 생명에게 줄 수 있는 내 최대한의 자비.
3, 죽이기 싫어,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방어를 위해 느린 속도로 올라온다.
2, 사람을 죽인다는 건,
그의 초점이 고개를 젖는다.
1초, 누군가에게 소중한 다른 누군가를 잃게 만드는 거야.
그래도 죽여야 해, 참아 내자.
0, 나에게도 소중한 다른 누군가가 있어.
카타나는 알파벳 X 자의 첫 획을 그리는 궤적을 그린다. 예정된 궤도를 완성해나가자 그의 몸은 허리를 경계로 두 부분으로 분리되며,
[쏴아아아]
붉은 피를 뿜어낸다. 마치 피를 내뿜는 샤워기같다. 아, 맞아, 이런 모습을 걸리면 안 되지. 누가 보기 전에 어서 빨리 이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 발각되는 건 싫으니까.
[...]
소리도 없이, 내 카타나는 같은 방식으로 시체 위에 그어져 있는 수직선을 베어낸다. 카타나의 미동이 멈추자 그의 시체와 끝없이 붉게 물들여졌던 밀도 높은 포도주빛 피, 모두가 말끔히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골목길에 있는 그림자는 나 혼자의 것, 그의 어두운 그림자는 없다.
[퍼어어엉]
한참 전에 등장했던 파이어볼이 이제서야 벽에 닿으며 폭발했다. 그 탓으로 고요했던 루트에 조그마한 먼지바람이 일어나며 먼지 알알 하나하나가 내 기관지에 들러붙었다.
에에취! 이제 영락없이 집사에게 ‘왜 또 교복을 피에 젖셔 가지고 왔습니까’ 라는 소리를 들으며 혼나는 일만 남았다. 정말이지, 학교 숙제도 아직 못 했는데.
하아아, 갑자기 머리는 아파 오고 잿빛 잡음은 그치지 않는다. 이럴 때면 울고 싶단 말이야, 누군가에게 기댈 수만 있다면.
오늘,
그렇게 나는 하루를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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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죄송합니다. 소제목을 2006년 2월 27일 자로 변경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착오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괴뢰감이 느껴지는 전개감... 그 외에는 전 만족! 다만, 대화체가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 들지도..
P.S : 종말의 칸타타는 언제 다시 쓰게 될런지, 머엉~
재료로는 판타지 특유의 세계를 넣되 양념은 현실에서 나타는 사회상에 대한 비판으로 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다만 직접적인 비판은 안할 예정. 꾸벅,[퍼어어억]
14일에 올렸다가 삭제했던 것을 수정해서 다시 올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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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존재는 세상을 파괴합니다. 그래도 존재할 건가요? -
- 그녀의 四界 0┃ζ 無, Prolou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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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떨어진다.
이런 느낌, 대체 뭘까?
이건 기분 나쁜 꿈일까.
아니면 끝없이 낙차하고 있는 자이로드롭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기권을 뚫고 힘차게 지구로 환향하는 우주선일까.
아니잖아, 이런 느낌은.
이 느낌, 그래,
다 알고 있는데 뭘 망설이고 있는 걸까.
[치이이익]
들려. 뇌수를 쏟아내는 잿빛 잡음이, 정말 잘 들려.
나는 추락하는 경비행기에 가족들과 함께 몸을 맡기고 있다. 앞 좌석 너머로 아빠, 엄마의 당황한 표정이 위성사정 안 좋은 축구 중계방송처럼 끊기며 전해진다. 그 표정 속에서도 나는 떨어지며 내 시야는 한없이 펼쳐지는 푸른 하늘이 태풍에 휘몰리듯 흔들린다. 안테나를 잘못 건드린 TV 속에 아빠하고 엄마가 있기라도 하는 걸까. 도대체, 왜 점점 안 보이는 거야, 왜 점점 흐려지는 거야, 보고 싶은데, 더 보고 싶은데.
나는 아빠의 거친 턱수염과,
레드 로즈 향기를 내는 어머니의 머릿결에서 떨어진다.
가지마, 가지 말아요. 딸이 있잖아요,
왜 먼저 가요,
가지 마세요,
저 혼자 남으면 어떻게 살아요,
그래도 괜찮다고요?
뭐가 괜찮,
“유키양, 도서잔고 정리 안하나? 오늘 신간잡지가 대거 입하되는 날인거 알지?”
난데 없는 사람의 음성에 눈을 뜬 내 시야에 펼쳐진 것은 부모님의 모습이 아니라 이상한 아저씨의 모습. 아, 또 꿈꾼거구나. 이 꿈은 왜 늘 결말이 이런식일까, 기분 나쁘게. 이렇게 갑자기 이상한 세계로 빠져드는 판타스틱 꿈 같은 거, 나는 안 바란다. 꿈이라도 현실적인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런 꿈은 오늘 하루 일진이 재수없다는 예언과도 다름없다.
“잔고라니요...? 어제 다 정리했던걸로.... 저기, 토요일인데도 그런거 꼭 해야하나요?”
그래도 이렇게 기분 나쁜 꿈이라도 꿈은 꿈이기에 누군가가 훼방내버리면 나로써는 심히 불쾌할 수 밖에 없다. 왜 남의 단잠을 깨우는거냐고. 나쁘다, 나쁜 아저씨. 이런 아저씨가 무슨 수로 국회의원들에게 좋은 점수를 따서 도서관 관리장이라는 요직에 앉아있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
“이 잡지들을 갖다 버리든지 가지든지 알아서 처리해주게.”
약간의 거드름을 더한 언행과 함께 도서관리장 아저씨가 내보인 옆 책상의 수북한 잡지들. 이, 이 잡지는 설마,
“하하하하, 상도동 할아버지의 에로 스페셜 콜렉션이지!”
그렇다. 한 사람이 몇 년을 걸쳐 수집한 에로 잡지.
아니, 왜 이런 성인 잡지가 도서관에 있는 거냐고. 게다가 소녀인 내 앞에서 이런 걸 보여줘도 되는 겁니까.
“뭘 어떻게 하란 거죠?”
“그냥 갖다 버리란 말이지, 여자가 들기에는 조금 많은가?”
족히 100권은 넘어보일 것으로 보이는 막대한 양. 상도동 할아버지,잊고 싶어도 못 잊는다. 한 사람의 요구로 건전한 도서관에 성인잡지를 들이게 된 일부터 시작해서 내 엉덩이를 건드려놓고도 모른척하는 교활한 눈빛까지, 그 할아버지가 인류에 펼친 악덕들은 내 기억에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그 할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악덕들은 전파되지 않을 것, 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아저씨, 이걸 나보고 버리라고? 음...
역시 이런 짓은 싫어!
“저는 여자에요, 이런 야리꾸리한 잡지들을 세트로 묶어서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ㅡ여기는 적당히 애교를 넣는 것이 포인트ㅡ
아아아아앙~ 아저씨, 너무해요.”
“하하하하, 그런가. 대신 이 잡지를 버리고 오면 특별한거 하나를 주지.”
남자는 애교에 약하다, 이것이 내 인생의 철학! 다만 이 아저씨도 상당한 실력이다. 당근과 채찍 전술이란 말인가. 으음, 상도동 할아버지와 이 아저씨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 궁금한데.
“예에, 알겠어요. 옆에 폐품장에 버리면 되는 거죠.”
“그런데 너네 학교 친구들한테 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니? 청춘의 정열이라게 있는 법인데.”
주기는 뭘 줘, 이런 에로 잡지따위 그냥 버려버리겠어.
“저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그건 그렇고요, 특별히 준다는 게 뭐죠?”
뭘 준다고 하니 은근히 기대... 아니 기대하지 않는다.
“먼저 가서 쉬라고.”
이런 바보같으니! 먼저 퇴근하고 싶었으면 진작에 내가 알아서 가버렸단 말이다. 아저씨가 상관할게 아니란 말이야. 뭐, 그래도 가서 쉬라고 말하니 고맙기는 하다.
문제는 이런 잡지를 어떻게 몰래 버리냐는 건데... 잘못보이면 박스로 에로 잡지를 수집하는 변태 여학생으로 찍힐 수 있는 탓에 빠른 시간 내에 이걸 처리해야 한다. 에로잡지들이 꽤나 무거운지라 현관으로 끌고 가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청객은 가까스로 내가 현관문 턱을 넘겼을 때쯤 공격을 시도했다.
“도서 대출은 어디서 하나요?”
무슨 소리야, 도서 대출? 그냥 이 에로잡지나 가지고 가라. 꽁짜야, 꽁짜.
“크으으음, 아... 뭐라고 하셨죠?”
“도서 대출, 어디서 하냐구요. 저기, 설마 외국인이신가요?”
두근두근, 글쎄 어디서 하더라.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떡하지.
“1층 카운터에서 등록하시고 대출 받으시면 되는데요.”
오오오오, 내 입이 알아서 말을 다 해주네. 이런 고마울데가. 나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임기응변을 하는 자신을 보며 들뜬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아니, 그런데 남자면 이렇게 낑껑거리며 짐을 옮기는 소녀가 있으면 도와주어야 되는게 예의다. 처량한 소녀의 모습을 보면 도와주어야지 말이야. 이건 레이디퍼스트도 아니고 레이디라스트잖아. 그건 그렇고 이 남자, 뭐라고 했지. 뭐어, 외국인?
이 사람, 내가 혼혈인이라는것이 불만인거야. 머리색만 보고서 외국인이라고 판단해버리다니. 이래서 한국땅에서는 혼혈인이 살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냥 일반적인 한국인이 노랑머리로 물들었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나. 이 도서관에서 외국인이냐는 소리 들은게 요번으로 몇 번 째인지, 짜증나게.
어찌 되었든 간에 결론적으로 폐품장 한 쪽에 저속한 물건들이 들어있는 종이박스 몇 개가 추가되었다. 할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예를 표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저벅저벅, 두 발을 가지는 동물들이 하는 직립보행을 나 자신도 한다. 이 도서관에서 우리 집은 결코 먼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직선거리의 경우로써 실제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길을 이용한다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 바퀴를 빙 돌아야한다. 이로 인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줄이기 위해 나는 도서관-집간의 새로운 루트를 발견했는데 다름 아닌 그 루트란 집집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내 나름대로의 통로이다. 사람 없고, 폭 좁고, 먼지 다분한 이 루트가 맘에 들 턱이 없지만 시간 낭비하는 건 질색이니까 이용할 수 밖에.
콜록콜록, 인적이 닿지 않은 길의 먼지가 발에 채이며 내 기관지를 공격할 때의 기분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이 루트를 이용해본 사람만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햇빛이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이 루트에 먼지가 얼마나 많이 숨어있을 지는... 정말,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이 길에 보도 좀 설치하라고 집사에게 말해봐야지, 이왕이면 확장공사도 조금 하고, 이렇게 어두워서야. 컬록콜록.
[치이이익]
재채기가 나왔던 바로 그 때, 누군가가 내가 걷고 있는 이 루트를 장악했다. 그와 함께 내 귀에 걸리는 전자음의 잡티.
[치이이익]
“너가 이유키에델린인가?”
ㅡ너가 이유키에델린인가ㅡ
사람, 내 앞을 채운 어두운 물체의 실체는 검은 가죽점퍼를 입은 육중한 사내의 그림자. 그 그림자는 옷깃을 휘날리며 내 이름 여섯 자를 물었다.
그 느낌이야.
바로 그 느낌. 꿈에서만 느낄 수 있던 잿빛 잡음. 당신은,
ㅡ누굴까ㅡ
“대답이 없다면 너가 이유키에델린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무엇보다 유키에델린양, 놀랐다. 보통 인적과 소음은 비례하는게 정상이건만, 도서관같은 장소를 선택할 줄이야. 이러면 마법사 입장에서 나서기가 얼마나 껄끄러운지 아는가?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써 목격자를 만들기 쉬운 장소, 조그마한 소리도 잡아냄으로써 침입을 감지할 수 있는 장소. 도서관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한 장소였다. 확실히 유키에델린양의 요번 은신처는 좋았다. 다만, 그래봤자 너가 지금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꺼내든다.
“호오, 카타나인가? 한국에서 일본도를 보게 될 줄이야.”
나에게 응수하듯 이 남자도 손을 올리더니,
“하지만 칼의 시대는 갔다!”
[슈으으으으]
그 손에 화염이 불어난다. 그것은 내 숨결을 끊기 위한 것.
ㅡ알겠어, 당신이 누구인지.ㅡ
유키에델린, 마음을 굳게 먹자. 나도 싸워야 해.
유키에델린, 또 하나의 세계를 펼치는 것이다. 그러자 갖가지 물체 위에 이 세계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수직선이 그려진다.
“세계의 질서를 위해서 사라지거라, 유키에델린.”
그리자! 그리자! 그리자! 이 전혀 다른 세계의 수직선에 내 카타나로 곡선을 그리는 거야. 곧 화염이 내 몸을 삼키더라도 괜찮아.
카타나의 날 끝을 따라 그려진 곡선은 청아하게 화염의 구체 위에 수직으로 그려진 하나의 선을 잘라낸다.
[쉬이익]
더 이상 화염의 구체는 달려들지 않는다. 다만 뉴턴 역학의 순리에 맞지 않은 운동법칙을 가지며 기어들 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파이어볼의 시간은 주위의 그것보다 10배는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파이어볼이 느려지다니! 무슨 마법인거냐!”
마법? 아니야. 이런 걸로 놀라지 마.
이 정도로, 놀라?
당신은, 두려워?
시간이 들어맞지 않는 이 광경이 놀라워?
나는 수 백번, 수 천번 이런 광경을 보고 있는데.
놀란만한 시간, 당신에게는 줄 수 없어. 나는 당신을 죽여야 하니까.
한번 더 수직선을 잘라낸다.
“어...떠...엇...케...”
카타나의 등에 비친 햇살이 투영된 나의 각막에 그 남자는 슬로우모드의 리플레이비디오.
3초의 시간을 줄 것이다. 이것이 곧 세상과 작별하게 될 가녀린 생명에게 줄 수 있는 내 최대한의 자비.
3, 죽이기 싫어,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방어를 위해 느린 속도로 올라온다.
2, 사람을 죽인다는 건,
그의 초점이 고개를 젖는다.
1초, 누군가에게 소중한 다른 누군가를 잃게 만드는 거야.
그래도 죽여야 해, 참아 내자.
0, 나에게도 소중한 다른 누군가가 있어.
카타나는 알파벳 X 자의 첫 획을 그리는 궤적을 그린다. 예정된 궤도를 완성해나가자 그의 몸은 허리를 경계로 두 부분으로 분리되며,
[쏴아아아]
붉은 피를 뿜어낸다. 마치 피를 내뿜는 샤워기같다. 아, 맞아, 이런 모습을 걸리면 안 되지. 누가 보기 전에 어서 빨리 이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 발각되는 건 싫으니까.
[...]
소리도 없이, 내 카타나는 같은 방식으로 시체 위에 그어져 있는 수직선을 베어낸다. 카타나의 미동이 멈추자 그의 시체와 끝없이 붉게 물들여졌던 밀도 높은 포도주빛 피, 모두가 말끔히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골목길에 있는 그림자는 나 혼자의 것, 그의 어두운 그림자는 없다.
[퍼어어엉]
한참 전에 등장했던 파이어볼이 이제서야 벽에 닿으며 폭발했다. 그 탓으로 고요했던 루트에 조그마한 먼지바람이 일어나며 먼지 알알 하나하나가 내 기관지에 들러붙었다.
에에취! 이제 영락없이 집사에게 ‘왜 또 교복을 피에 젖셔 가지고 왔습니까’ 라는 소리를 들으며 혼나는 일만 남았다. 정말이지, 학교 숙제도 아직 못 했는데.
하아아, 갑자기 머리는 아파 오고 잿빛 잡음은 그치지 않는다. 이럴 때면 울고 싶단 말이야, 누군가에게 기댈 수만 있다면.
오늘,
그렇게 나는 하루를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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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죄송합니다. 소제목을 2006년 2월 27일 자로 변경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착오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괴뢰감이 느껴지는 전개감... 그 외에는 전 만족! 다만, 대화체가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 들지도..
P.S : 종말의 칸타타는 언제 다시 쓰게 될런지, 머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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