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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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
제12화 - 유적 기지 -
"베르단디!!"
케이는 핫세를 업은 채로 서둘러 훨윈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훨윈드에는 베르단디도 지로도 보이지 않았다.
케이가 핫세를 구하러 간 사이에 놈들이 여길 습격한 것 같았다. 케이는 베르단디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 때문에 허둥대고 있었다. 그나마 가게 주변과 안에서는 전투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
단은 베르단디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케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절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절에선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역시나 거기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케이는 다시 핫세를 업고 절 쪽으로 황급히 날아가
기 시작했다.
"울드! 스쿨드! 케이마 씨!!"
절 안으로 들어선 케이는 또 한번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마당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담
벼락이며 베르단디가 정성스레 가꾸던 꽃밭하며 모두가 다 엉망진창이었다. 마당에서 케이를 맞은 것은 처
참하게 부서진 밤페이와 시글의 잔해뿐이었다. 케이는 헤드 센서에 모든 의식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울드들
의 반응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린드가 있었음에도 결국 모두 당하고 만 것이다. 설마 크로노스가 그들을
죽인 걸까?
케이는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절망감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가이버의 힘만 있으면 어떻
게든 될 줄 알았지만 그는 결국 그 누구도 지키질 못했다. 절망한 케이는 그 자리에서 절규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녀석들이 요구하는 데로 따랐을 것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한 여자와 소중한 가족들. 그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이것이 그 동안 가이버의 위
력에 도취돼서 이것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교만에 사로잡힌 대가란 말인가. 신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시련을 준 단 말인가. 만약 베르단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은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 때 갑자기 등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케이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검
은 선글라스를 낀 장발의 낮선 남자가 서 있었다. 케이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갑자기 나타난 장발의 남자가 케이 옆에 누워있는 핫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넨 최소한 이 아가씨는 구했잖은가. 모리사토 케이군."
"어떻게 내 이름을..!"
"으음...."
그 때 핫세가 의식이 돌아왔다. 깜짝 놀란 케이는 황급히 핫세의 상반신을 일으켰다. 핫세가 천천히 눈을
뜨는 것이 보였다.
"핫세! 괜찮아?"
"으음...여기는....아!!"
그 때 핫세의 눈에 공포가 번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아!!!"
"핫세! 왜 그래, 진정해!!"
케이는 핫세가 갑자기 이렇게 발작을 하자 당황스러웠다. 아까 조아노이드를 봤기 때문에 예전의 정신적 충
격이 다시 도진 것으로 보였다. 그 때 그 남자가 케이에게 다가왔다.
"자네 모습 때문에 놀라는 것 같군. 어서 식장을 해제해."
"아! 그러고 보니..."
케이는 황급히 식장을 해제하였다. 그러고 보니 핫세가 가이버를 알 리가 없었는데도 바보같이 계속해서 식
장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아까 조아노이드가 쳐들어 와서 큰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핫세에겐 가이버나
조아노이드나 똑같이 괴물로 보일 것은 자명했다. 식장을 푼 케이는 핫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
다.
"꺄악! 꺄아아!!"
"핫세! 나야, 진정해!!"
케이의 얼굴을 보자 핫세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핫세는 한동안 멍하니 케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가 뭔
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이윽고 핫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케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으아앙! 선배!!"
케이는 이제 괜찮다고 말하면서 핫세를 조용히 다독였다. 안 그래도 고물 수집장에서 조아노이드에게 습격
당한 것 때문에 정신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기까지 한 상황에서 또 한번 습격을 당했으니 핫세가 놀
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핫세는 안도감에 계속해서 케이 품에서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 케이는 안쓰러
운 표정으로 핫세를 다독였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수수께기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도
대체 저 남자의 정체는 뭐길래 식장을 하고 있던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게다가 아까 식장을
해제하라는 말을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가이버란 것이 뭔지도 알고 있는 듯 해 보였다.
"대체...누구시죠?"
"그건 가면서 설명하지.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어서 빨리 납치된 사람들을 구해야 해."
그 남자의 말에 케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서 빨리 베르단디들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케이마 씨도. 케
이는 케이마 씨 생각에 괴로워하였다. 아무 상관도 없는 케이마 씨가 자신 때문에 이런 모진 고초를 겪게
된 것이다. 어서 빨리 구해야 했다. 그러나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놈들이 갈만한 곳을 알고 있어. 그리로 데려다 주겠네."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 아가씨도 함께 오는 게 좋을 것 같군. 혼자두는건 위험해."
케이는 핫세를 달래서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생각 같아선 여기가 무사하다면 울드나 린드에게 맡겨 두고
싶었지만 여기도 당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핫세도 같이 가야 했다.
그 때 잠시 핫세를 바라보던 케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납치될 당시 핫세는 집에서 쉬고 있는 도중이어서 짧
은 반바지 차림에 점퍼만 걸치고 있었다. 이대로는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케이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청바지를 찾아 가지고 나와서 핫세에게 내줫다. 물론 케이의 키가 아무리 작다해도 핫세보다는 큰 지라 그
의 바지는 핫세에게는 너무 헐렁했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고 결정적으로 집안에 옷이라고는 케이 것
밖에는 없었다. 다른 여신들은 각자 옷은 자기가 직접 법술로 만들어 입었으니 옷을 사올 필요가 없었다.
핫세는 일단 되는데로 그 바지를 입어서 여행준비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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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룸...!!"
"솜룸이 당했다고....이럴수가!"
임무를 끝낸 후 집결지에 모인 로스트 넘버즈 멤버인 앱톰과 다임은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들
의 동료인 솜룸이 가이버 I 에게 당하고 말았다는 비보였다. 가이버를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라고 그렇게 신
신당부를 했건만 어쩌다 당했단 말인가. 앱톰은 그 때 그를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다며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었다. 꽉 깨문 입술 사이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실수다. 설마 가이버 I 이 그 쪽으로 갈 줄이야.... 가이버 I 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가게에 그냥 머물
러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아키토는 슬픔에 젖어있는 두 사람에게 솔직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아니, 인정하는 척을 했다. 아키토
는 처음부터 솜룸을 미끼로 쓸 생각이었던 것이다. 가이버 I 의 주의를 다른데로 돌려야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아키토는 얼마 안돼는 병력의 대부분을 타력혼간사로 보내고 자신은 소수의 병력
만 데리고 간 상황이었으므로 그 때 가이버 I 이 계속 가게에 머물러 있었으면 작전은 백프로 실패할 상황
이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언젠가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골치 아픈 로스트 넘버즈 녀석을 하나라도 줄여
두자는 것도 있었다. 어쨌든 자신의 진의를 드러낼 수 없는 지금은 비통한 척 연기를 해야 했다.
"아닙니다....솜룸 녀석이 미숙한 거지요. 도망치는 것도 제대로 못하다니...."
로스트 넘버즈 중 리더격에 속하는 앱톰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간신히 대답하였다. 다임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체 말이 없었다. 절친한 동료를 잃은 둘의 충격은 컸다.
"어쨌든 지금은 빨리 유적기지로 가야 한다. 언제 가이버 I 이 추적해 올지도 모르니까. 현재 우리 병력만으
로는 그 놈을 당해낼 수 없다."
타력혼간사를 공격하면서 병력의 피해가 생각보다 컸다. 지금 거기서 납치해온 사람들은 모두 마취제를 맡
게 해서 강제로 잠재운 상태였다. 그냥 데리고 갔다가는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키토 팀이 납치해온 베르단디와 지로는 지금 다른 차량에 타고 있어서 울드들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기에 얌전히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잠재우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들을 이제 유적기지까지 연행해야 한다. 그러나 유적기지는 여기서 차로 한참을 달려가야 한다.
그 사이에 가족들과 동료들을 모두 납치 당한 가이버 I 이 이들을 구하러 올 거라는 건 뻔한 노릇이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유적기지 쪽에도 증원병력을 보내라고 요청은 했지만 그 전에 가이버 I과 교전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현재의 병력으로는 가이버 I 을 이기기는커녕 발을 묶어놓을 수도 없었다. 아키토가 난감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키토님.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 때 앱톰과 다임이 아키토의 앞으로 나왔다. 아키토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저희가 적당한 지점에서 가이버 I 을 저지하겠습니다. 그 틈에 아키토 님은 유적기지로 향하십시오."
"너무 위험하다. 너희 둘만으로는...."
"자신 있습니다! 그러니 맡겨만 주십시오."
아키토는 잠시 그 두사람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둘의 눈에는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가
이버 I 에게 솜룸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아키토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긴 채로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그러라
고 하며 승낙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아키토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골치 아픈 나머지 혹 두개를 자기 손
을 댈 필요 없이 가이버 I 을 이용해서 정리해 버릴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아키토는 일단은 연기에 충실
하였다. 두 사람에겐 반드시 너무 무리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면서 걱정스러워 하는 연기를 하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주변의 누구도 아키토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
"좋아, 이제 출발이다. 유적 기지로 가자!"
아키토가 승용차에 오르면서 출발을 지시하였다. 베르단디들을 태운 승합차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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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마사키?"
절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남자가 케이와 핫세에게 명함을 건넸다. 거기엔 '르포라이터 무라카미 마사키'라는
직함과 이름이 쓰여있었다. 지금 케이와 핫세는 무라카미의 차를 타고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원래는 조그만 잡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크로노스의 존재를 알게 됐지. 그
뒤로 놈들의 뒤를 쫓고 있어. 지금은 프리랜서야."
자기들 이외에도 크로노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가이버같은 강한
힘을 가지지 못한 일반인이 크로노스의 존재를 파헤치고 다녔는데도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한 노
릇이었다.
"용케 지금까지 살아 있었군요. 크로노스는 목격자를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데...."
"뭐...운이 좋았지."
케이의 말을 듣고 있던 핫세는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는 말에 벌벌 떨었다. 자기가 어쩌다가 이런 일에 말
려들게 됐는지 핫세는 지금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핫세와는 대조적으로 앞의 두 남자
는 묵묵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잠시 후 무라카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족을 납치 당한 자네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가이버가 녀석들 손에 넘어가면 이 지구는 완전히
끝장이야."
"그럼 지금의 제가 뭘 할 수 있단 거죠.... 전 베르단디를 지키지 못했어요. 그리고 케이마씨도 울드도 스쿨
드도 지로 선배까지!"
"내가 아까도 말했지? 최소한 뒤에 저 아가씨는 지키지 않았냐고."
무라카미의 말에 핫세는 케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줬다. 물론 어딘가 상당히 어색해 보이는 미소였지만 말이
다. 지금 핫세는 이 모든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차를 타고 오면서 케이에게서 그간의 일을 전부
들은 핫세였지만 여전히 전혀 실감이 가질 않았다. 크로노스, 조아노이드, 가이버..... 이 모든 것이 만화에나
나오는 일만 같았고 전혀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으니 가서 구출해 오면 돼."
"그래서 거기가 어디죠? 아까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었죠."
베르단디들이 끌려간 곳을 안다는 무라카미의 말에 케이의 얼굴엔 간절함이 나타났다.
"여기서 두어 시간 정도 달리면 미나카미 산이란 곳에 도착한다."
"미나카미 산? 그곳에 뭐가 있죠?"
케이는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다만 핫세만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레릭스 포인트(Relics Point)... 크로노스의 유적 기지다."
"유적...기지?"
"일본 지부가 없어진 지금, 녀석들이 갈만한 곳은 거기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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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대의 승합차가 어느 산 중턱에서 멈춰 섰다. 그들이 멈춰선 곳은 이미 채굴작업이 끝나서 문을 닫은 폐
광의 입구였다. 잠시 후 안에서 굳게 닫힌 철문을 누군가가 열었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흰
핼맷을 쓰고 검은 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크로노스의 조직원들인 것이다. 이윽고 승합차들은 광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안에서 멈춰 섰다. 승합차 안에 타고 있던 조직원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내렸다.
그들은 내리자마자 아직 문이 안 열린 다른 두 대의 승합차의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승합차 안에는 여러 명의 여성들과 초로의 남성이 타고 있었다. 절에서 크로노스에게
납치된 울드와 스쿨드, 린드, 케이마 였다. 이들은 모두 수갑을 차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린드의 수갑은
그 가녀린 손목에 채우기에는 너무나 굵고 커다란 수갑이었다. 절에서의 전투당시 린드에게 당한 조아노이
드가 상당한 지라 크로노스는 이들을 연행할 때 린드만큼은 엉뚱한 짓 못하도록 특별히 더 강력한 수갑을
채운 것이다.
다른 한대의 승합차 뒷문도 열렸다. 그리고 거기서도 두 명의 여성이 내렸다. 훨윈드에서 아키토들에게 납
치된 베르단디와 지로였다. 이들의 손에도 예외 없이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베르단디들의 표정은 극히 어
두웠다.
"언니!!"
"베르단디!"
베르단디를 본 울드와 스쿨드가 그녀에게 달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조직원들은 그녀들을 그 자
리에서 거칠게 밀치며 제지하였다. 그 와중에 스쿨드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울드는 무슨 짓이냐며 항의
했지만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빨리 움직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베르단디 역시 울드와 스쿨드들을 발견
하고 다가가려 했으나 조직원들이 제지하는 바람에 그러질 못했다.
조직원들은 그들을 끌고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간 걸은 후에 이들은 폐광의 막힌 벽까지 도착하
였다. 맨 선두의 조직원이 손에 든 리모컨을 누르자 막힌 벽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모두
는 깜짝 놀랐다. 린드가 조직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가 어디냐."
"유적 기지다. 자, 어서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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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카미 산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있지. 그중 하나가 미나카미 산에는 신들의 숨겨진 은신처가 있다는 전
설도 있어."
그 대목에서 케이는 잠시 베르단디 생각이 났다. 지금 이 자리에 베르단디가 있다면 저 소리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건 없다고 대답할까, 아니면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할까. 어쩌면 환하게 웃으면서 꼭 한번 가
보고 싶다고 할지도 모른다. 케이는 잠시 그런 망상을 하였다.
무라카미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미나카미 산은 또한 인공적으로 조성된 산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반적인 산
처럼 주변의 산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마치 화산처럼 그 산만 우뚝 솟아 있으니 그런 주장도 나오는 것이
었다. 황당한 얘기지만 그 산이 세계 최대의 '미완성' 피라미드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학자는 피라미드 얘기는 그냥 웃어넘기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산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에는 의견의 일치
를 보고 있었다.
"자네는 다케시로군발 지진이라고 들어봤나?"
무라카미의 물음에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 때 뒤쪽에 있던 핫세가 나섰다.
"아, 1965년 당시 미나카미 산 일대에서 연속으로 일어났다던 지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답이야. 잘 알고 있군."
무라카미의 칭찬에 핫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케이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무라카미와 핫세를 번갈아
보고만 있었다. 다케시로군발 지진이란 말에 핫세는 비로소 미나카미 산이 어딘지 기억을 해냈다. 고교시절
핫세는 지리는 자신이 있는 과목이었기에 배운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케시로군발 지진이란 1965년 미나카미 산 일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지진을 일컫는 말인데 그 때 당시
조사기록에 의하면 미나카미 산이 바로 진앙의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지진이 많은 거야 일본이란 나라의 특
징이라 할 수 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며칠 동안 크고 작은 지진이 쉴 새 없이 연속으로 일어난
경우는 처음이었는지라 당시 지질학자들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되었었다. 다행히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고 최초 지진발생당시 모두 대피해서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 때 당시 한 지질학자의 표현을 빌자
면 마치 심술궂은 거인이 땅 속에서 심심할 때마다 땅을 뒤흔드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그 지진을 보고 크로노스는 미나카미 산 아래에 잠들어 있는 유적의 존재를 파악한 것 같아. 그래서 그곳
을 기지로 만들고 지금도 유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
"유적...이라뇨?"
핫세가 무라카미에게 물었다. 그 사이에 차는 도로를 벗어나서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었다. 케이가 이 길로
가는 게 맞냐고 묻자 무라카미는 이 길은 험하긴 하지만 지름길이고 무엇보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크
로노스의 감시망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대답을 하였다. 무라카미의 차는 비포장도로에 강한 SUV 였으
니 이런 길을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차안이 심하게 흔들리자 핫세가 좀 어지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
었다. 같은 차안에 있더라도 운전자보다는 승객이 멀미를 더 심하게 느끼는 법이다.
"유적. 그것은 바로 강림자의 유산이지."
"강림자....."
핫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케이는 그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비로소 그
말을 생각해 내었다. 일본지부에서 탈출할 때 일본지부 사령관 리헐트 규오가 그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수
십억년전 아무 것도 없는 지구에 내려왔다는 정체불명의 외계 집단. 수십억년에 걸쳐 지구에 생명체들을 창
조하고 진화시키면서 그들이 원하는 생명체를 탐구했다는 존재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던 궁극의 생체 병
기의 베이스로 쓸 목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인류....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지금도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것도 놈들은 알고 있어."
이윽고 무라카미는 결정적인 말을 하였다.
"유니트는 바로 그곳에서 발굴되었지."
"유니트가!!"
케이는 크게 놀랐다. 모든 일의 시작, 유니트가 발굴된 곳이 바로 미나카미 산이라니.... 케이는 입술을 지긋
이 깨물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도대체 무라카미라는 이 남자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일개 개인이 조사한다고 쉽게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조
사하면서 크로노스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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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오는군."
비포장도로를 열심히 달려오는 자동차를 언덕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검은 선글라스에 검
은 양복을 입고 있는 두 남자는 매서운 눈으로 그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미리 이곳에서 매복해 있길
잘했다. 그들 역시 이 길이 유적기지로 가는 시간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
다. 가족들이 납치 당한 가이버 I 은 어떻게 해서든 아키토들을 빨리 따라잡으려 할 테고 그렇다면 이 길로
오는 것이 정답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가이버 I 이 과연 이 지역 지리에 익숙할지가 의문이어서 처음엔 과
연 여기 매복해 있는 것이 잘하는 짓인가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역시 다행스럽게도 가이
버 I 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왼쪽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남자, 로스트 넘버 앱톰이 옆에 있던 땅딸막한
남자, 다임에게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지?"
"새삼스럽게 뭘 그런걸 물어?"
이 둘은 지금 가이버 I 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아키토에게는 아키토 들이 유적기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만 하겠다고 했지만 이들은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솜룸의 원수, 가이버 I 을
자신들의 손으로 해치워서 솜룸의 원수를 갚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겐 지금이 그들의 이름을
조직 내에서 널리 떨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조제 실험에 실패한 손종 실험체로서 그저 살아있
는 실험 동물 취급만 받아오던 그들이었다. 즉, 특이한 능력 덕에 전력으로서 인정은 받았으나 정규 조아노
이드 들의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가이버 I 을 잡으면 아무도 더 이상 자신들을 멸시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비참하게 먼저간 자신들의 친구 솜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헌화였던 것이다.
"솜룸을 위해,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이 승부, 반드시 이기자!!"
"오옷!!"
앱톰과 다임은 결의를 다지듯 힘있게 손을 마주 잡았다. 이윽고 앱톰이 먼저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가기 시
작했다.
"크오오오!!"
갑자기 다임의 몸이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태양볕 아래에서 아이스크림이 녹아 내리듯 그의 몸은 순
식간에 녹아버렸다. 그리고 녹은 물은 그대로 땅속에 스며들었다. 다임이 서 있던 자리에는 다임이 입고 있
던 옷만이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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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여러 번 갈아탄 후 베르단디들은 이윽고 어느 문 앞에 다다랐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들은 이
기지의 규모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특히나 일본 지부에도 가 봤었던 스쿨드의 놀라움은 더 했다. 일본지부
와는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오면서 복도의 창문을 통해서 본 지하기지의 거대함과 조아노이드 조
제시설의 규모는 감히 일본지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이만큼 거대한 기지가 지하에 건설되었고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베르단디들이 도착한 문 앞에는 경비병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척보기에도 상당한 수준의 전자자물쇠
가 채워져 있었다. 경비병들이 이들을 보자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요원들은 베르단디들을 그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방안에는 전면에 대형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여러 명의 요원들이 열심히 콘솔을 조작하고 있
었다. 아마도 여기는 중앙 사령실일 것이다.
"유적기지에 온 것을 환영한다, 여신들."
그 때 메인데스크에 있던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베르단디들을 맞았다. 그를 본 스쿨드는 경악하였다. 그 때
일본지부에서 헬기가 폭발했을 때 죽었다고 생각되던 남자, 일본지부 총사령관이라던...
"리..리헐트 규오?!! 당신이 어떻게...!!"
"호오~ 그래, 내 이름을 아직도 기억해 주다니. 기특한걸, 꼬마 여신."
어떻게 잊을 수가 있는가. 케이를 죽게 한 남자, 사람의 생명을 실험용 쥐 취급했던 광기 어린 모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데. 겁에 질린 스쿨드는 베르단디의 품에 매달렸다. 베르단디 역시 스쿨드를 꼬옥
안았다.
"당신이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거야! 그 때 헬기가 폭발했을 때...!"
"그 정도는 내겐 우스울 뿐이야. 십이신장을 그렇게 우습게 보지 말라고. 꼬마."
"우리를 어쩌실 셈인가요? 게다가 어째서 케이씨를 이렇게나 괴롭히는 건가요."
베르단디의 말에 규오는 잠시 뜸을 들였다.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해 보였다. 이윽고 규오는 잔인하게
웃으며 말했다.
"두번째 질문부터 먼저. 왜냐하면 녀석은 우리의 최고 기밀인 유니트 가이버를 식장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너희들은 일단은 인질이지. 너희들만 있으면 가이버 I 녀석은 맘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케이씨를 괴롭히지 마세요!"
베르단디의 절규에 규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마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참을 웃은 규오는 베르단디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보다는 댁들 걱정이나 하시지 그래? 난 지금 너희들을 실험체로 쓸까 생각중인데 말야."
"누가! 누가 실험체 같은 게 될 줄 알고!!"
일본지부에서 규오에게 똑같은 협박을 받았고 또한 조아노이드를 조제하는 광경을 본 스쿨드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모습이었다. 언니뿐 아니라 자기들 모두가 다 조아노이드가 된다니... 그
런 끔찍한 모습이 된다니! 그 때 케이마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규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희들이 뭘 하려는 건지는 난 관심 없다. 다만....내 아들을 건드리면 너희들을 절대 용서치 않을 거다."
규오는 가소롭다는 듯 케이마를 노려보았지만 케이마 역시 그 눈빛에 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규오가 먼저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뭐....좋아. 어차피 가이버 I 은 너희를 구하겠답시고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니까."
"케이씨가...!"
"여기 오는 순간이 녀석의 제삿날이다. 그때 까진 얌전히들 있어."
규오가 주변의 요원들에게 손짓을 하자 요원들이 베르단디들을 다시 밖으로 끌고 나갔다. 베르단디는 케이
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베르단디가 보기에도 이곳의 규모는 엄청났다. 게다가 규오의 태도로 봐서는 아무래
도 무슨 함정을 파 놓은 것 같았다. 사실 저렇게 상대방의 접근을 알고 있다면 거기에 대응해서 함정을 파
놓는건 상식이다. 케이가 자신들을 구하려 하다가 함정에 빠질 것만 같아 베르단디는 더럭 겁이 났다. 고개
를 돌려 케이마를 보니 케이마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베르단디는 마음속
으로 간절히 빌었다.
'케이씨...위험해요. 제발 오지 마세요..!'
******************************************
"아니!"
-끼이이익!!
코너를 돌자마자 갑자기 무라카미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케이와 핫세의 몸이 급격하게 앞으로 쏠렸다. 안
전벨트를 매고 있지 않았더라면 크게 다칠뻔 했다.
"무슨 일입니까!"
케이의 질문에 무라카미는 앞을 가리켰다. 케이가 앞을 보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길 한가운데에 서있
는것이 보였다. 케이는 직감적으로 저 녀석이 크로노스 라는 것을 눈치챘다. 케이가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무라카미 씨! 핫세와 함께 여기 있어요!"
차 앞으로 달려나간 케이는 바로 가이버로 변신하였다.
"가이버!!"
-퍼엉!!
케이의 변신장면을 핫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차안에서 케이가
어느 정도 설명은 했었지만 처음에는 도저히 실감이 가질 않았다. 케이가 어디서 이상한 만화를 보고 와서
거짓말을 꾸며대는 줄만 알았다. 케이가 절에서 핫세의 눈앞에서 변신을 풀기까지 했었는데도 말이다. 솔직
히 그때는 패닉 상태였는지라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지만. 핫세는 왠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자
신을 습격한 괴물들, 그리고 이상하게 변신하는 케이, 모든 것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뿐이었고 그녀에게는
공포였다.
"꽉 잡아! 핫세!!"
-부아앙!!
그 때 무라카미가 차를 급속히 후진시키기 시작했다. 벨트를 매고 있었어도 핫세의 몸은 급격히 흔들렸다.
무라카미는 일단 케이가 맘 편히 싸울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줄려는 것이었다. 무라카미의 차가 이내 현장
에서 멀어졌다.
"잘 왔다, 가이버 I. 여기서는 우리가 상대해 주마."
그 남자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라니? 현장에는 저 남자 한 명밖에 없었다. 설마 주변 숲
속에 다른 놈들이 매복해 있는 것일까. 그러나 헤드 센서에는 이렇다할 반응이 없었다. 그 때였다.
-슈우욱!
"아니!! 이건...!"
갑자기 멀쩡하던 땅이 늪지대처럼 변했다. 케이는 순식간에 발목까지 빠져버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몸
을 움직이려 해도 이상하게 늪속에 빨려 들어간 발이 떨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마치 늪지대가 자신의 양발
을 잡고 있는 것처럼. 케이가 놀라고 있을 때 주변에 있던 나무들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
뭇가지들이 길게 늘어나면서 케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촤악!
늘어난 나뭇가지들이 케이의 양팔을 단단히 휘감았다. 갑자기 나뭇가지들이 자신을 감싸자 케이는 또 한번
놀랐다. 여긴 뭔가 이상했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케이의 적인 것만 같았다. 양손과 양발을 잡힌 케이는 꼼
짝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잡고 있는 힘도 대단했다. 나무라고 얕잡아 볼 만한 게 아니었다.
"어떠냐! 주변의 대지와 융합해서 그 일대의 땅과 수목을 자신의 팔다리처럼 부려 아군에게 유리한 전장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다임의 능력이다!"
"뭐라고! 그런 일이...!"
"이 주변의 모든 땅과 풀, 나무. 전부 다임의 육체란 말이다!"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의 말에 케이는 경악하였다. 도대체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저 말대로
이 일대의 모든 땅과 숲이 전부 크로노스의 조아노이드(케이는 이들이 로스트 넘버즈란 것을 몰랐다.)의 수
족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공격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일대의 숲을 메가 스매셔로 전부 태워버리기라도 해
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투둑!
갑자기 그 남자의 옷 여기저기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굴도 변하기 시작했다. 역시 저 남자는 조아
노이드 였다. 그런데 변신을 완료한 남자를 본 케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저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
이었다.
"가...가이버?!!"
틀림없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틀림없이 가이버 였다! 변신과정이 좀 이상했지만 어쨌든 모습은 가이버 였다.
유니트는 3개뿐이었고 그나마도 전부 해방됐었는데 어떻게 제 4의 가이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키잉!
상대 가이버의 오른팔에 있던 돌기가 늘어나면서 고주파 소드가 되었다. 소드를 전개한 체로 그 가이버가
케이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위기를 느낀 케이가 서둘러 빠져나가려 했지만 나무가지와 땅이 그의 사
지를 단단히 묶고 있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조아노이드들을 해치웠던 네 녀석이 그들을 쓰러트렸던 무기로 최후를 맞는다. 이거 재밌
는걸!"
크로노스 가이버가 팔을 높게 들어올렸다. 그대로 케이를 베어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케이는 서둘러 고
개를 돌려 헤드빔을 쏴서 오른팔을 잡고 있던 나뭇가지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고주파 소드를 전개하
였다.
-키이잉!!
"큭!"
간발의 차이로 케이는 상대방의 소드를 막아낼 수 있었다. 공격이 막힌 앱톰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케이는 오른팔의 소드로 나머지 왼손을 잡고 있던 나무를 베어버리고 복부의 중력제어구에 의식을 집
중하였다. 케이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야압!"
-"아니!! 이런...!"
공중에 떠오르는 케이를 다임은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으나 케이가 일정높이 이상 올라가자 더는 잡지 못
하고 놓치고 말았다. 케이는 이렇게 다임의 주박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임은 케이를 다시 잡
으려고 주변의 모든 크고 작은 나무들을 총 동원하였다. 나뭇가지들이 쭉쭉 뻗어나면서 케이를 잡으려고 하
였다.
-사사삭!
-푸슝!
"윽!"
나뭇가지들만이 아니었다. 앱톰까지 헤드빔을 쏘면서 케이의 움직임을 봉하려 하였다. 상대방 가이버 한 명
뿐이라면 모를까 주변의 모든 사물이 온통 적인 이 상황에서는 케이는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그저 피해
다니는 수밖에는 없었다. 접근해오는 나무가지들을 고주파 소드로 베어버리고 계속해서 땅바닥에다가 헤드
빔도 쏘아봤지만 상대방은 전혀 타격이 없는 듯 했다. 엡톰은 그런 케이의 행동을 큰 소리로 비웃었다.
"하하하! 그런 게 다임에게 통할 줄 아느냐!"
그 사이 앱톰은 고주파 소드를 전개하고는 케이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주변에서 밀려드는 나무와 진흙의 손
을 피하느라 케이는 정신이 없었다. 이번의 앱톰의 매서운 공격도 케이는 간신히 피했다. 이 상황에서는 케
이는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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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현장에 한번 가볼 테니 핫세는 여기 있어!"
무라카미는 품속에서 커다란 리볼버 권총을 꺼내들었다. 총에 대해 잘 모르는 핫세가 봐도 도저히 인간이
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보일 정도로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총이었다. 무라카미는 일단 총의 실린더를
열어 장전된 탄환을 확인하였다. 놀란 표정의 핫세에게 무라카미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크로노스에 관해서 취재하려면 이 정도는 있어야 목숨 부지할 수 있겠더라고. 그래서 큰맘먹고 한 자루 주
문했지."
거기까지 말한 무라카미는 차에서 여분의 예비탄약을 꺼내서 주머니 속에 넣고는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핫
세도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무라카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으라니까! 위험해."
"시...싫어요! 나 혼자 여기 있으라니... 너무 무섭다고요!"
"현장은 더 무서울 껄?"
"혼자 있는 것 보단 나아요!"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 핫세를 보며 무라카미는 피식 웃었다. 하긴 여기에 핫세를 혼자 두는 것도 왠지
찜찜했다. 크로노스 놈들이 이런 비포장 지름길로 자신들이 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면 지금도 어쩌면 감
시당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 상황에서 핫세만 여기 놔뒀다간 놈들의 습격을 받을 지도 몰랐다. 어차피 현
장에 간다해도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만 않으면 그렇게 위험할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핫세도 같이
데려가기로 하였다.
"케이 선배는...무사하겠죠?"
"물론이지. 그는 가이버이고 지금까지 숱한 역경을 극복해 왔을 테니 괜찮을 꺼야. 아마도....."
두 사람은 서둘러 케이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 근처까지 오자 고함소리와 함께 폭
음도 들려왔다. 무라카미는 리볼버의 해머를 재껴서 사격준비를 마친 후 주변의 수풀에 몸을 숨겨가며 살며
시 다가가기 시작했다. 핫세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무라카미의 곁에 착 달라붙은 채로 움직였다. 얼마 지나
지 않아 두 사람은 전투 장면을 직접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아니, 저럴 수가....! 저건 설마 가이버?!"
무라카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케이와 싸우고 있는 건 틀림없이 가이버였다. 그가 알고 있기로 유
니트는 단 3개. 그것도 그 유니트들은 전부 개방된 상태였다. 그런데 저 모습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이버들
과 상당히 달랐다. 그렇다면 제 4의 가이버? 게다가 주변의 풍경도 어딘가 이상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
인지 주변의 나뭇가지와 흙이 케이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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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푸슝! 푸슝!
저돌적으로 돌격해 오는 앱톰을 헤드빔으로 견제하면서 케이는 다임이라는 녀석을 격파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일단 이 주변 땅과 융합했다는 녀석을 해치우지 못하면 상대방 가이버와 정상적으로 교전할 방법이
없었다. 안 그래도 저번의 리스카와는 1대 1로 두 번에 걸쳐 붙었지만 사실상 케이의 판정패였던 만큼 가이
버끼리의 대결은 극히 힘든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과 1대 1로 붙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
다.
"꺄아악!!"
그 때 어디선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케이가 고개를 돌려보니 도대체 여길 왜 왔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핫세와 무라카미가 진흙더미에 꽉 잡혀있는 것이 보였다.
"어딜보냐! 가이버!!"
-퍼억!
"으악!"
그 때 케이의 빈틈을 노리고 앱톰의 발차기가 작렬하였다. 그 충격으로 케이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
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임이 흙무더기를 조종해서 케이의 사지를 꽁꽁 묶어놨다. 이번엔 아까처럼 쉽게
탈출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앱톰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케이에게 다가왔다.
"으하하! 드디어 잡았다, 가이버 I."
"이익!"
케이가 헤드빔을 발사하려고 하였다. 그 순간 앱톰이 손을 들어 케이를 제지하였다.
"어이쿠,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안 그러면....다임!"
"커억!!"
"아악!"
그 순간 뒤에서 무라카미와 핫세의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왔다. 다임이 힘을 강하게 줘서 두 사람을 꽉 쥐
어짜고 있었다. 케이는 헤드빔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인질이 붙잡혀 있는 이상 케이로서는 어떤 행동도 취
할 수가 없었다.
"비...비겁하다!"
"흥! 싸움이란 누가 이기느냐지 누가 정당하냐가 아니야."
무라카미는 전신을 옥죄는 고통 속에서도 상대방 가이버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외형은 틀림없이 가이
버였지만 어딘가가 이상했다. 마치 뭔가가 빠진 듯 해 보였다. 그러다 무라카미는 결정적인 점을 찾아냈다.
"속지마! 케이! 녀석은 진짜 가이버가 아냐. 이마를 봐라!"
무라카미의 외침에 케이는 상대방 가이버의 이마를 쳐다봤다. 그리고 나서 케이는 깜짝 놀랐다. 그 동안 싸
우느라고 미쳐 눈치채지 못했지만 놈의 이마에는 가이버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컨트롤 메탈이 없었다!
"흥! 눈치채는 게 좀 늦었군."
앱톰은 상대방의 외형을 흉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원래 그는 손종실험체가 되기 전에 신형 조아노이드
조제 실험에 자원했었다. 그 프로젝트의 목표는 상황에 맞춰 그 상황에 가장 잘 맞는 최적의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며 싸울 수 있는 만능형 조아노이드였다. 상당히 무모하달 수 있는 본 프로젝트는 결국 실패
했고 앱톰은 손종실험체가 되고 말았다. 외형을 바꾸는 건 가능했지만 카피 대상의 능력까지 백프로 카피하
는 건 불가능했고 그나마 카피한 능력조차도 오리지널에 비하면 위력이 한참 떨어졌다. 지금의 이 모습도
가이버를 카피한 것이지만 위력 면에서는 가이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대지와 융합하는 능력을 가진 다임이 서포트 해준다면 아무리 가이버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게다
가 지금은 인질까지 잡고 있지 않은가. 이제 승리는 눈앞에 있었다.
"비겁한 놈들! 핫세와 무라카미씨는 놔줘! 저들은 아무 상관없어!"
"흥! 맘대로 지껄여봐라!!"
-퍽!
앱톰은 꼼짝도 못하는 케이에게 발길질을 하였다. 앱톰의 발차기에 턱을 맞은 케이의 얼굴이 위로 확 들렸
다. 앱톰은 그대로 가이버 I 에게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퍽! 팍! 퍼억!!
사지가 묶여있는 케이는 앱톰의 맹공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앱톰은 열심히 케이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한참
후 앱톰이 공격을 멈췄다.
"헉! 헉!...자, 어떠냐! 가이버 I !!"
때리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든 일인지라 앱톰은 지금 심하게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한참 때리다보니 주
먹도 아픈지 손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도 보였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케이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물
론 상대방이 얼굴을 걷어차고 주먹질을 해대고 있으니 아프고 정신이 없기야 했지만 타격으로 입는 데미지
보다는 강식장갑의 회복속도가 더 빠를 지경이었다. 머리가 울리고 있다는 것 빼고는 지금 케이는 큰 타격
은 없었다. 때리고 있는 앱톰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역시나 '짝퉁'은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케이는 사지가 단단히 붙들려 있는 상태고 아무리 타격이 경미하다고는 해도 이렇게 계속 맞
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무라카미와 핫세가 인질로 잡혀 있는 판국이었으니 이 난관을 어떻
게 해서든 돌파해야 했다.
'안돼! 이대로는 아무리 케이라도...'
무라카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경솔히 여기로 오지만 않았어도 케이가 이렇게 고전하고 있지는 않았
을 것이다. 그러나 설마 이런 녀석들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마도 저 녀석들은 말로만 듣던 손종실험체
부대, 로스트 넘버 코만도일 것이다. 정규 조아노이드라면 이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때 무라카미
의 눈에 상대방 가이버가 고주파 소드를 전개하는 것이 보였다. 그대로 케이를 베어버릴 생각이었던 것이
다. 이젠 이판사판이었다. 무라카미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집중하였다.
-"놔 줘!"
그 순간 다임의 정신에 강력한 사념파가 전해져 왔다. 사념파를 방사할 수 있는 건 여기 일본에서는 규오
사령관뿐이니 규오가 명령을 전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놔주라니? 설마...
-"세 사람을 놔줘라, 당장!"
-"규..규오 사령관님?"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왜 규오는 저런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는 걸까? 그러나 다시 한번 놔주라는 호
통이 떨어지자 다임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령관의 명령이었다. 다임은 세 사
람을 잡고 있던 흙을 풀어버렸다.
-탁!
"아니!"
공격이 들어오기 직전 손발이 자유로워진 케이는 황급히 앱톰의 팔을 붙들어 공격을 막는데 성공했다. 그리
고 바로 앱톰의 복부에 발길질을 하였다.
-퍼억!
"커헉!!"
앱톰이 복부를 걷어차여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에 케이는 뒤로 물러나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복부의 중력
제어구를 제어해서 프레셔 캐논을 발사하였다.
-파앙! 콰지직!!
"끄아아아!!"
앱톰은 황급히 몸을 비틀어 그 공격을 피하려 하였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프레셔 캐논에 그는 왼팔을 통
째로 잃고 말았다. 날아간 왼팔부위를 움켜쥐며 앱톰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임!! 이 멍청아! 왜 저녀석들을 놔준 거야!!"
-"애...앱톰! 그게 아냐! 그러니까 사...."
-푸욱!
그 때 갑자기 가이버 I 이 고주파 소드를 전개하고는 땅바닥에다가 소드를 꽂았다. 그 모습을 본 앱톰은 코
웃음을 쳤다. 저 녀석, 아까 질리도록 시도해 보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 틀림없었다. 외부에서 아
무리 땅바닥을 공격해도 다임에겐 어떠한 타격도 입힐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다시 저런 바보짓을 하다니.
그러나 케이는 바보짓을 한게 아니었다. 케이 역시 알고 있었다. 밖에서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이 다임이
란 녀석에겐 어떠한 데미지도 줄 수가 없다는 것을. 설령 이 일대 숲 전체를 메가 스매셔로 태워버린다 해
도 녀석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밖에서의 공격이 소용없다면 방법은 하나, 안으로 직접 공격을 가한다! 케이
는 고주파 소드를 땅에 박은 채로 고주파 소드의 진동수를 평소보다 훨씬 높이기 시작했다.
-키이이잉!!!
"끄아아아아!!!"
효과가 있었다. 땅속으로 전해지는 맹렬한 진동에 견디지 못한 다임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케이에게도
들려왔다. 그리고 다임에게 동화된 주변의 나무들도 마구 움직이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가 이윽고 잠잠해졌다. 다임이 드디어 죽은 것이다.
"다...다임!!!"
앱톰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솜룸에 이어 다임까지, 절친한 친구 두 명을 같은 날 잃어버린 것이다. 그
것도 가이버 I 에게 둘다. 앱톰은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 그는 남은 오른팔의 고주파 소드를 전개하고는 가
이버 I 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이놈! 가이버어어!!!!"
-키잉!
케이 역시 바로 고주파 소드로 맞받아 쳤다. 둘의 소드가 잠시 서로 힘겨루기를 하였다. 그러나 위력 면에
떨어지는 앱톰의 소드는 더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잘리고 말았다. 완벽한 앱톰의 패배였다. 꽉 쥔 그의 주
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때 앱톰의 머리속에 규오의 사념파가 수신되었다. 그는 몰랐지만 다임이 들
었던 '가짜'가 아니라 진짜 규오의 명령이었다.
-"아키토 일행이 유적기지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철퇴하라."
"하지만 사령관님! 그러면 동료들을 잃은 저의 원통함은 어떻게 풀라는 말씀입니까!"
앱톰이 항의를 했지만 규오의 명령은 단호했다.
-"철퇴다!!"
어쩔 수가 없었다. 사령관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앱톰은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왼팔을 잃고 카피한 능력들 자체도 오리지널 가이버 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앱톰은 아
무리 발버둥쳐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싸운 건 다임이 적극적으로 서포트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앱톰은 헤드빔을 몇 방 날려 가이버를 견제한 후 빠르게 숲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는 도망치
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솜룸, 다임....언젠가 반드시 너희들의 원수를 갚아주겠다. 반드시...!!'
"괜찮으세요!"
케이는 무라카미와 핫세의 안부를 살폈다. 핫세는 많이 놀란 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무라카미는 상당히
태연했다. 다행히도 두 사람 다 특별한 외상은 없었다. 케이는 식장을 풀고 핫세를 진정시켰다.
"자네는 괜찮은가, 케이."
"예. 전 괜찮아요. 그런데 대체 왜 위험하게 이런데 오신거에요! 하마터면 큰일 날뻔 했잖아요."
"미안하네, 그냥 자네가 좀 걱정돼서...."
무라카미는 멋쩍은 듯 웃으며 사과하였다. 케이가 계속 다독여주자 핫세는 눈에 띄게 진정되었다. 무라카미
는 그런 케이를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상황에서 대지와 융합한 로스트 넘버를 용케도 공략하는 방법
을 찾아내다니. 아무리 싸움에 소질이 없다고는 해도 역시 케이는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케이라면
자신들의 비원을 풀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오랜 숙원을, 그리고 그들의 의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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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었던 거군....케이가 날 돌려보내려 했던 이유가...."
감옥 안에서 케이마는 베르단디와 스쿨드에게 그 간의 일을 모두 들었다. 사령실에서 끌려나온 베르단디들
은 그대로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베르단디와 스쿨드는 케이마와 지로, 린드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다 설명하였다. 설명을 다 들은 지로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고 린드의 표정 역시 평소
와는 달리 상당히 놀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케이마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녀석...어릴 때 싸움 같은 게 벌어지면 항상 맞고만 들어오던 녀석이 지금은 저런 괴물들과 싸운단 말이
지...."
"죄송해요! 그 때 제가 그런걸 줍지만 않았어도...!"
스쿨드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 숙여 케이마에게 사과하였다. 사실 스쿨드는 이제까지 자책감에 시달려왔다.
처음에 케이에게 엄청난 힘이 생겼다고 생각했을 때는 오히려 그걸 즐기기까지 했다. 상대방은 무시무시한
괴물들이었지만 케이는 그보다 더 강했으니까. 그러나 속속 강적들이 나타나면서 케이가 고전하고 결국엔
엔자임에게 죽기까지 하자 스쿨드는 이건 특촬물 같은 게 아니라 엄연한, 그리고 아주 잔인한 현실임을 깨
달았다. 그리고 크로노스로 인해 일상생활이 깨져 나가기 시작하자 스쿨드의 자책감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그 때 유니트를 줍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사랑하는
언니랑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말려들고 말았다. 그러나 케이마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단지 재수가 없었을 뿐, 네 잘못은 아니다. 내가 보기엔 그래. 그 때 그 자리에 내가 있었더라도
아마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거다. 나도 호기심은 많은 편이라 말이지...."
스쿨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으로 케이마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스쿨드는 케이마의 한
마디에 마음속에 응어리져있던 죄책감이 사라지는 듯 했다. 케이마의 미소에 스쿨드의 표정엔 안도감이 나
타나기 시작했다. 잘못을 용서받은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베르단디 역시 미소를 지으며 스쿨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케이마는 베르단디에게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녀석이 그렇게까지 싸울 수 있던 것도 다 네 덕분이야. 정말 고맙다."
"아뇨, 전 케이씨에게 아무 것도 해 드리질 못했어요. 오히려 전 케이씨에게 도움만 받았는 걸요..."
"아니, 네 덕분이다. 싸움같은거엔 영 소질이 없는 저 녀석이 저런 괴물들과 싸운다니, 그건 다 너를 지키고
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어. 그게 없었다면 아무리 가이버...라고 하나? 아무튼 그런 게 되었다 해도
싸울 수 없었을 거다. 다 네 덕분이야...."
"케이마씨...."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면 케이같이 소심한 남자가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케이는 베르단디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반드시
베르단디에게 돌아가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격렬한 싸움에 몸을 던졌다. 지금의 케이를 만든 것은 단순
히 가이버 유니트 만이 아니라 사랑의 힘이었다.
"베르단디, 너희들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었지?"
"네...."
지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지로는 좀 케이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선후배 사이로서 그 동안
마음을 툭 터놓고 지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중대한 일을 끝까지 숨기려고만 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자기한테라도 상담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지로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는 없었지만.
"너희들, 사표는 수리 안 하겠어. 잠시 휴직하는 걸로 해줄게."
"지로씨. 저희는..."
"아! 아! 됐어요, 됐어. 난 너희들 이외에 다른 직원들과 일하기는 힘들 것 같애. 그러니까 노는 기간동안 이
녀석들을 물리치고 빨리 회사로 돌아오라고. 이건 사장 명령이야, 알았지?"
지로는 웃으면서 이렇게 케이와 베르단디의 사직 건에 종지부를 찍었다. 베르단디 역시 웃으며 그러겠노라
고 대답하였다. 베르단디 역시 이제까지 케이랑 지로와 함께 한 직장생활이 정말로 즐거웠기에 정말 떠나기
가 싫었다. 잠시나마 감옥 안에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뚜벅뚜벅
그 때 누군가가 베르단디들이 갇혀있던 감옥으로 걸어들어 왔다. 그는 감옥 앞에서 경비 중이던 경비병들을
밖으로 내 보냈다. 그 사람이 감옥 앞에 서자 다들 깜짝 놀랐다. 마키시마 아키토 였다.
"마키시마!"
"마키시마 씨!"
지로는 그 자리에서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베르단디들 역시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로와
베르단디는 아키토가 크로노스의 일원이라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나 지로는 아키토에게 강한 배신
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로가 유리벽 앞에 바짝 다가가 아키토에게 소리쳤다.
"마키시마. 난 너에게 정말 실망했어! 네가 이런 녀석들과 한패라니!"
"선배...저는 선배가..."
"선배라고 부르지마!! 난 너같은 후배녀석 둔 적 없어!"
지로는 유리벽을 거세게 두들기며 소리쳤다. 베르단디는 그런 지로를 말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아키토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케이와 함께 아키토와 레이스를 하였을 때, 그리고 이제까지 단 몇
번 뿐이지만 그녀가 봤던 아키토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울드와 스쿨드 역시 아키토를 바라보는 눈
빛이 곱지만은 않았다. 아키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나시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허나, 제 말을 들어주세요."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려고...!"
"들어요!"
갑자기 아키토가 큰소리로 지로를 제지하였다. 지로는 아키토의 기세에 움찔하였다.
"제 진짜 목적은 크로노스의 타도입니다."
아키토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크로노스의 타도라니... 지로는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런 말 누가 믿을 줄 알아!"
"그렇다면.... 여기서 제 말이 진짜라는 걸 증명해 보이죠."
아키토가 감옥 앞에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가 갑자기 강하게 외쳤다.
"식장!!!"
-퍼어엉!!
갑자기 아키토 주위에 강렬한 충격파가 발생하였다. 감옥에 있던 모두가 그 폭음과 섬광에 움찔하였다. 잠
시후 고개를 든 모두는 크게 놀랐다. 아키토가 이상하게 변해 있던 것이다. 스쿨드는 그 모습을 금방 알아
챘다.
"가...가이버 III ?!!"
스쿨드의 말에 다들 다시 한번 놀랐다. 케이를 몇 번 도와준 적이 있다는,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제3의
식장자. 그가 바로 아키토였다니! 지로를 비롯해서 모두는 그저 멍하니 가이버 III, 아키토를 바라보고만 있
었다. 그 때 아키토가 팔에 있던 돌기를 늘려서 고주파 소드를 전개하였다.
"다들 물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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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잉! 위잉!
-"제3블럭에 가이버 출현! 출동 가능한 조아노이드는 즉시 제3블럭으로 급행하라!!"
기지 내부에 요란하게 경보가 울리면서 전투원들에게 출동을 명하는 방송이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
다. 그 소리를 들은 아키토와 베르단디 일행은 마음이 더욱 더 급해졌다. 생각보다 빨리 알아차렸다며 아키
토가 혀를 찼다. 이렇게 된 이상은 강행 돌파뿐이었다. 아키토가 선두에서 일행을 인도하였고 린드는 귀걸
이의 장식을 배틀액스로 만든 후 맨 뒤를 지키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크로노스가 이들을 감옥에 투옥할 때
여신들이 몸에 지니고 있는 건 하다못해 거울 같은 것까지 다 걷어갔지만 린드의 귀걸이는 미처 회수하지
못한 것이다. 린드의 귀걸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배틀액스를 휴대하기 편하게 극도로 축소시켜 놓은 것
이었다.
-끼릭
그 때 아키토의 머리에 있던 센서가 적의 존재를 감지해 내었다. 아키토는 적이 접근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
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선수필승! 아키토가 먼저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앞뒤 볼 것 없이 바로 고주파 소드를 휘둘렀다.
"하아앗!"
-부웅!!
"끄아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조아노이드는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아키토의 소드에 의해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아
키토가 일행들을 이끌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어차피 엘리베이터는 놈들이 통제할 것이 뻔하므로 처음부터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모두들 아키토를 따라 열심히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서둘러!"
다들 열심히 아키토를 뒤따라오고 있었지만 솔직히 아키토는 이들을 데리고 나간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이곳 유적기지는 아키토가 구석구석까지 잘 알고 있는 곳이기에 그 혼자 만이라면 탈출은 식은 죽 먹기였
다. 그러나 이런 '혹덩어리'들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들을 다 데리고 나가는 건 만만치 않게 시간이 걸
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동안에 계속해서 적들이 몰려오게 되므로 탈출에 성공할 확률이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이들은 가이버 I, 케이의 소중한 연인이고 가족들이며 동료들이
었다. 만약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경우 이들을 구하겠답시고 가이버 I 이 무슨 무모한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목적을 위해서는 가이버 I 의 힘이 꼭 필요했다. 이런 곳에서 혼자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아키토는 필사적으로 이들을 구출하려 했던 것이다.
"크아아!!"
계단을 다 올라가자 마자 또 한 무리의 조아노이드 들이 아키토들의 앞길을 막았다. 아키토는 일단 선두의
녀석을 향해 헤드빔을 날려서 전열을 붕괴시킨 후 고주파 소드를 전
댓글목록

베이더경님의 댓글
베이더경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오시마가 가이버가 되면....그녀석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이용해서 가이버 형태의 병기들을 생산하려 들지도...[워낙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만 든 놈이라..]
그나저나 린드의 귀걸이가[있는지도 몰랐다는.] 비상시에 사용되는 부스터의 일종[베틀엑스]였다니....그것도 몰랐다는.[만화책 갯펄로 봤다는 -퍼퍽!]
마키시마 씨는...하수인인 척 하는 주인공 중 한명이라고 생각했지만..가이버라고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는....[좀 더 치밀하게 봐야겠군요..좀 더 침착하게..]
크로노스 타도를 위하여!!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베이더경님의 댓글
베이더경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가장 기대되는 사람이 기자입니다. 리볼버도 그러하고...
[언론보도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행동과 정신...맘에 들어!! 우리 제국군에서 스카우트..-라고 하기도 전에 가이버에게 얻어 맞겠죠?]
마키시마..볼수록 안타깝다는...좀만 더 갔으면 하수인이 아니라 두목급들을 암살하는 쾌거를 누릴 수도 있었을텐데..[-_- 천운이구려! -퍼퍽!]
어쩄든 즐거운 하루 되시고....린드의 장식구에 대해서는 설명 잘 봤습니다. [만화에서도 실제로 그러하다면...제가 소설속에서 써먹어도 될까요? 답변좀.]
설정 빨리 올려주세요!! [이쪽은 MG42와 기타 잡다한 무기들을 맨, 마족 특유의 검은 고딕 복장으로 무장한 묠니르를 구상중이라는...]

가이버님의 댓글
가이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린드의 귀걸이 얘기는 25권 말미에 잠깐 나옵니다. ^^;;; 원작자님이 쓰신것을 제가 허락도 없이 써먹었으니 제가 베이더경께 뭐라 할 수는 없죠. ^^;;;;;;;
사실 무라카미의 리볼버는 몇 컷 밖에 안나오지만 설정이 꽤나 골치아픈 놈인지라 고민입니다. 그냥 적당히 넘어가긴 그렇고....원작만화에서는 비중도 없는 평범한 권총이었건만 애니에 와서는 44매그넘의 7배의 화약을 집어넣은 괴물 탄환을 쓴다는 무시무시한 설정으로 뻥튀기 돼서 돌아오는 통에...orz 그리고 이번화에서는 특별히 설정 올릴게 없습니다. 여기 등장한 놈들은 이미 11화 설정에 다 나왔으니.... 내일 쯤 해서 이 팬픽에 등장하는 가이버쪽 인물들을 쭉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