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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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part 2.-
프롤로그 -제압-
8월 17일 U.T.C. (Universal Time Coordinated : 협정 세계시(時)) 02:24AM 도쿄 신주쿠
한여름의 도쿄는 찌는 듯이 더웠다. 태양빛이 사정없이 내려 쪼이고 있었고 도로의 아스팔트는 그 열기를 그대로 방출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그 날 오전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민들은 저마다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거나 차가운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더위를 견뎌 보려 하고 있었다.
도쿄 신주쿠의 한 복판, 도쿄 도청 옆에 건설중인 초고층 빌딩 클라우드 게이트는 이제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건물 자체는 이제 거의 다 올라갔고 현재는 내부 공사와 옥상 부분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높이 412m 로 일본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클라우드 게이트는 일본 건설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비록 외국 건설업체가 공사를 주도해서 일본 건설업계는 건설 초기 일부 하청정도만 참여 했었지만 그 높이만으로도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아니, 사실 세간의 관심은 클라우드 게이트 보다는 현재 미국에서 건설중인 세계 최고층 빌딩인 '필라즈 오브 헤븐(Pillars of Heaven)'에 집중돼 있었다. 높이 1072m, 대지면적 86064㎡ 로 단연 세계 최고의 높이라 할 수 있는 이 건물은 현시점에서 세계 각국의 모든 건설업계나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높이가 1000m 에 육박하는 건물은 앞으로 잘해야 십년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하던 기존 통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필라즈 오브 헤븐 역시 현재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곳 말고도 전 세계 곳곳에서 잇따라 초고층 빌딩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클라우드 게이트와 필라즈 오브 헤븐을 합쳐 모두 12개의 초고층 빌딩이 신기하게도 모두 다 비슷한 시기에 완공될 예정이었다.
-"본 안건은 국민의 조세 부담을 심화 시키고 물가 상승을 부추길 수 있는....."
도쿄 신주쿠 거리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서는 국회 본회의가 한창 중계 중이었다. 오늘은 국회의 대정부 질문이 있는 날이었다. 야당 의원의 카메라를 의식한 듯 한 몸짓과 억양이 신주쿠 시내에 방송되고 있었다. 의원이 뭐라 하든 말든 시민들은 눈길하나 안 주고 각자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야당의원의 질문을 빙자한 일장 연설이 끝난 후 장관의 답변이 시작되었다.
-"에...정부로서는 본 안건에 관해서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그런데 장관의 행동이 좀 이상했다. 갑자기 그가 답변하다 말고 신음성을 흘리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의원들이 술렁이는 것이 보였다. 지나가던 시민들도 뭔가 이상하단 것을 알고는 전광판을 주시하였다.
-"장관?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신 겁니까?"
-"크...크으으으!!"
-"누가 의사를 불러와요! 환자가 발생했..."
-"크아아앙!!!"
그 순간 갑자기 장관의 몸이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한 마리의 괴물로 변신하였다. 그 모습을 본 의원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중계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어리둥절해 하였다. 국회 중계인줄 알았는데 괴수 영화를 틀어주는 거였나?
그러나 그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바로 그 순간, 크로노스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일제히 봉기하였다. 세계 곳곳에 잠입해 있던 크로노스의 조아노이드들이 일제히 전투 형태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조아노이드로 조제돼 있던 보통 사람들도 12신장의 사념파를 받자마자 이성을 잃고 조아노이드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크로노스의 지구 제압작전이 시작되었다.
8월 17일 U.T.C. 03:00AM 미국 L.A.
-터엉!! 터엉!!
한 밤중의 LA 시내 한 구석에서 묵직한 산탄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스엔젤레스 경찰관들이 자신들이 평소 휴대하고 다니는 무장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산탄총을 쏘는 소리였다. 이들은 지금 갑작스럽게 나타난 조아노이드 들을 상대로 절망적인 싸움을 하고 있었다.
"죽어!! 죽으란 말야!!"
-터엉! 터엉!!
LAPD 마크 스텍턴 경사는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조아노이드 (물론 그는 저게 조아노이드란건 모르고 있었지만)를 향해 산탄총을 열심히 난사해 대었다. 그 조아노이드는 마크의 산탄총탄 이외에도 바로 인근에 있는 3247 순찰차의 맥스 경사팀의 집중 사격까지 동시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조아노이드는 여러 발의 산탄 세례를 뒤집어쓰고도 태연했다. 조아노이드는 맥스 경위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철컥!
"Damn it!!"
정신없이 쏘다보니 장전된 탄환을 다 소모하고 말았다. 마크는 서둘러 순찰차 안에서 예비 탄약을 꺼내서는 재장전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너무 급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오늘따라 총이 말썽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자꾸 장전도중에 실수를 하였다. 그 때 맥스 경위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마크가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조아노이드는 맥스를 꽉 붙잡아서는 그를 무참하게 반으로 찢고 있었다. 맥스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크는 분노로 눈이 뒤집혔다.
"맥스!!!"
-터엉! 터엉!!
마크는 장전을 서둘러 마치고는 다시 그 조아노이드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맥스와 그 파트너를 잔인하게 찢어 죽인 그 조아노이드는 이번에는 마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놈이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마크는 뒤로 고개를 홱 돌려 파트너인 피트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피트는 지금 순찰차 조수석에 콕 틀어박혀서는 무전기만 붙잡고 있었다. 피트는 무전기에다 대고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계속해서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마크는 피트에게 고함을 질렀다.
"야! 이 멍청아!!! 무전기 붙잡고 있을 여유 있으면 나와서 총을 쏴!!"
마크가 소리 지르자 피트는 부들부들 떨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들었다. 지원 요청 따위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미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부터 본부와의 무선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것이다. 피트 저 멍청이, 처음 한조가 되었을 때는 자기가 무슨 클린트 이스트우드 쯤 되듯이 거들먹거리더니만 지금은 마치 병든 닭 마냥 고개나 푹 숙인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니. 하긴 이제 막 경찰이 된 신참에게 뭘 기대할까.
-타앙! 타앙!
피트는 총을 겨누고는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겨 대었다. 그러나 12게이지 산탄 세례에도 끄떡없는 괴물에게 9mm 권총탄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마크도 정신없이 산탄총을 쏴 대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탄환이 바닥나고 말았다. 마크는 허둥대며 다시 재장전을 하였다.
"으...으아아악!!!"
그 순간 갑자기 피트가 비명을 지르고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마크는 고개를 돌려서는 도망가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피트는 들은 척도 안했다. 피트는 어느 건물 사이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크르르르...!"
괴물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뻔했다. 마크는 공포에 질린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아노이드가 그 거대한 손을 마크에게 뻗어왔다. 그리고 그 조아노이드는 두 손으로 마크의 양 어깨를 꽉 붙잡아 올렸다. 마크의 눈동자에 조아노이드의 무시무시한 이빨이 비쳐졌다. 공포에 질린 마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F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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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뿐만 아니라 LA 시내 곳곳에서 경찰관들은 갑자기 여기저기서 나타난 조아노이드들을 상대로 절망적인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경관들이 휴대하고 다니는 권총이나 산탄총 정도로는 조아노이드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경찰관들의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일부 경관들은 근처 총포상에서 거의 강탈하다시피 해서 입수한 M-16소총 같은 군용 총기 등으로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부와아앙!!
"이야아아아!!!"
어떤 경관이 총이 통하지 않자 순찰차를 몰고는 마치 가미가제 돌격 하듯이 조아노이드에게 돌진하였지만 조아노이드는 그 순찰차를 오히려 정면에서 힘으로 멈춰 세워 버렸다. 그리고는 순찰차를 번쩍 들어서는 그대로 멀리 집어 던져 버렸다. 길가에 세워진 다른 승용차와 충돌한 그 순찰차는 그대로 대 폭발을 일으켰다.
경찰관들은 무전으로 다급하게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일반 경찰 화력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SWAT, 아니 이건 주방위군이 출동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무전기에는 잡음만이 울려 퍼졌다. 조아노이드들은 경찰본부 내부에도 출현하였던 것이다. 본부에 있던 SWAT 대원들도 자체 화력을 총동원하여 본부내에 나타난 조아노이드들에게 저항하였지만 거의 통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 경찰들보다 기량면에서 월등하다고 자부하던 LAPD SWAT 팀이지만 이들의 실력은 상대가 인간일 때나 통하는 것이었다. 얼마안가 경찰 본부는 다수의 조아노이드 들에게 제압당해 버렸다.
8월 17일 U.T.C 04:00AM 도쿄 롯폰기 자위대 방위청
"흠...총소리가 멋었네."
힐드는 (정확히는 힐드의 1000분의 1 분신) 방위청 근처에 있는 건물 옥상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힐드는 마치 재밌다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옆에 있는 마라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힐드는 그런 마라를 보며 핀잔을 주었다.
"얘는~ 왜 그렇게 당황해 하는 거야?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 같다. 까르르르!!"
"히...힐드님!"
마라는 자기가 어떻게 강아지랑 비교 되냐며 항의하려 했지만 차마 거기까진 말하지 못했다. 상대는 바로 다름 아닌 대 마계장이니까. 힐드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방위청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요란하게 울리던 총소리가 멎은 거 보니 완전히 제압당한 모양이었다. 지금은 건물 밖으로 조아노이드들이 나오고 있었다.
"후훗, 일이 꽤 재밌게 되가는걸. 녀석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어."
"마계의 군대를 파견하실 껀 가요?"
마라의 질문에 힐드는 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왜..왜라뇨? 인간계는 우리가 접수해야지 저런 놈들이 가지게 할 수는...!"
"그냥 가지라고 해."
그 말에 마라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인간계에 영향력을 넓히는 것은 이제까지 마계의 최우선 목표였다. 그런데 중간에 엉뚱한 놈들이 끼어들어서는 그걸 가로채려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힐드는 단호했다.
"인간계를 그냥 내 주는 건 좀 아깝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저놈들과 피터지게 싸울 수는 없어. 싸우게 되면 분명 이쪽도 무사하지 못해. 그것도 한두 명 손실도 아니고 어쩌면 패배할 수도 있어."
"힐드님! 우리 마계가 저 괴물들 보다 못하다는 겁니까?!!"
"어머? 넌 자신 있나 보네? 그럼 가서 저 괴물들 한 다섯 마리만 잡아 볼래?"
힐드의 말에 마라는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서는 입을 다물었다. 저 놈들에겐 기존의 마술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마라도 잘 알고 있었다. 마라는 일급마라고는 하지만 육체적 능력만으로도 싸울 수 있는 전투요원은 아니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마라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힐드는 다시 마라에게 얘기하였다.
"우린 놈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면 되는 거야. 괜히 희생자를 낼 필요는 없어."
같은 시각, 천상계
천상계 역시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크로노스의 일제 봉기로 인해 유그드라실 관리부는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갔고 전투부에는 출동대기명령이 떨어졌다. 천상계 최고 평의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해서 당장이라도 인간계로 내려가서 크로노스와 싸우느냐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느냐를 놓고 현재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아시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아프리카, 러시아! 조아노이드들이 안 나타난 데가 없어요!!"
"현재 인간계의 군대와 경찰들이 저항중이지만 절망적입니다!"
페이오스는 오퍼레이터들의 다급한 보고를 들으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놈들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 숫자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고 세계 구석구석에 조아노이드들이 매복해 있었다는 것에 또 놀랐다. 조아노이드들은 인간들의 군사, 행정의 중심부에서 정체를 드러내고는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있었다. 때문에 각국의 정부는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의 피해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심한 수준은 아니에요. 조아노이드들은 군대나 경찰, 행정기관 위주로만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민간인 사상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페이오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들만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도와줄 거면 지금 당장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전투부에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페이오스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건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크로노스의 조아노이드들에게는 기존의 법술식이 통하지 않는데다가 완력도 웬만한 왈큐레를 능가할 정도였으니 전면전을 벌일 경우 왈큐레의 피해가 상당히 클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인명피해를 각오해야 한다면 타블렛 계약을 맺고 있는 마계의 협조가 있어야 했다.
타블렛, 그것은 생명을 공유한다는 천계와 마계간의 계약이었다. 천계와 마계는 서로 반목하는 사이. 그것이 지나쳐서 서로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약 어느 한쪽이 죽는다면 계약을 맺은 다른 한쪽도 죽게 되는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하면 최악의 사태까지 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경우는 이 계약이 오히려 천상계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놈들과 싸웠을 때 단 한명의 인명피해도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었고 마계가 이를 용납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계도 같이 싸우던가 아니면 타블렛 계약을 일시적으로라도 해제해야 했지만 둘 다 천상계 입장에서는 선택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같은 소속의 다른 부대끼리도 힘든 게 공동작전인데 서로 반목하던 두 집단이 공동작전을 벌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타블렛을 일시 해제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마계가 천계의 뒤통수를 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페이오스는 슬쩍 시계를 봤다. 회의가 시작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다. 상황을 보아하니 회의는 더 길어질듯 싶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 쉬었다.
"아마도.... 천계는 개입하지 않을 거야....."
8월 17일 U.T.C. 04:45AM 북태평양 미 해군 소속 제 7함대
일본의 요코스카와 사세보를 전진기지로 삼고 있는 미 제 7함대는 재래식 항공모함 1척을 비롯해서 다수의 대공, 대잠 함정으로 편성한 아시아 최강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함대다. 항공모함 CV-63 키티호크가 탑재하는 약 80기의 각종 함재기를 비롯해서 함대 호위함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다수의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등의 막강한 타격력을 자랑하며 그 위력은 웬만한 중소국가를 경제적으로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을 정도다. 전투기 보유 숫자만 따지자면 7함대의 함재기 숫자를 훨씬 뛰어넘는 나라가 주변에 즐비하지만 그 어느 나라도 이 함대를 함부로 상대할 수가 없었다. 한국 육군의 대규모 훈련에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는 북한조차도 7함대가 서해상에 나타나면 전군에 비상이 걸린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바로 그 아시아 최강 함대의 지휘를 맡고 있는 전단장 존 E. 왓케인 중장은 지금 항모의 함교위에 올라와 있었다. 원래 전단장은 CIC (Combat Information Center : 전투 정보 지휘소)에 있어야 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비상중도 아니고 그리고 왓케인 본인은 사방이 스크린으로만 가득 찬 CIC가 좀 답답하기도 했었기에 훈련이나 비상사태가 아닌 한은 함교에 나와 있었다. 사방이 확 트인 함교에서는 드넓은 바다를 맘껏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전단장님! 본토로부터 긴급 전문입니다!"
그 때 전령이 함교로 올라와서 왓케인 중장을 찾았다. 전문을 건네받은 그는 그것을 읽어보고는 경악하였다.
"이건...!!"
"전단장님? 무슨 일입니까?"
왓케인 중장이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불안해진 함장이 물었다. 왓케인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데프콘(Defense Readiness Condition : 방어준비태세) 2가 발령되었네!"
"뭐라고요!!"
"데프콘 2 발령, 제 7함대는 전속력으로 본토로 귀항하라. 괴물들의 공격에 대비해서 경계에 만전을 기할 것."
전단장이 본토로 부터 온 전문의 주요 내용을 읽어 주었다. 발령권자가 누구인지, 발령시각은 언제인지 하는 다른 것들도 기제 돼 있었지만 그것까지 불러줄 필요는 없었다. 그것보다 문제는 갑자기 데프콘 2가 발령됐다는 것이었다. 미군의 경계 태세는 5가지로 나뉘게 되는데 이를 데프콘이라 칭한다. 5가 평시, 1은 교전상태를 의미하며 2는 임전태세를 갖추라는 의미였다. 2가 발령된다는 것은 사실상 전쟁이 발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평소의 데프콘 등급은 5 이었고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 등급이었다.
그런데 앞의 모든 단계를 다 건너뛰고 갑자기 2라니! 본토에 핵폭탄이라도 떨어지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북한 놈들이 탄도 미사일이라도 쏜 걸까? 아니다. 놈들의 미사일은 발사준비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액체 연료 미사일이고 그 완성도도 사실상 아주 낮은 조악한 물건이다. 게다가 놈들이 그걸 쏜 거라면 본토에서 미리 알아차렸겠지.
"그런데 괴물들의 공격에 대비하라뇨? 그게 무슨 뜻이죠?"
함장의 질문에 왓케인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괴물? 도대체 괴물이란 게 뭘 의미하는 거란 말인가. 무언가의 비유일까? 그러나 이런 중요한 전문을 보내면서 받는 상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를 넣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었다. 긴급 전문은 최대한 간단명료하면서도 그 의미를 확실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비유나 은유는 절대로 넣지 않는다. 왓케인은 본토로 부터 추가 전문은 없는지 알아보려 CIC로 내려갈 채비를 하였다. 바로 그 때였다!
-쿠우웅!!
갑자기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함교의 요원들이 창문을 내다보며 비명을 질렀다. 왓케인과 함장은 서둘러 그 쪽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화염에 휩싸인 채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구축함의 모습이 보였다. 선수에 쓰여 있는 헐 넘버(함 고유 번호)를 보니 알레이 버크급 이지스 구축함 DDG-54 커티스 윌버 였다. 왓케인은 황급히 CIC로 통하는 직통 전화기를 들었다.
"전단장이다! 대체 무슨 일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커티스 윌버가 갑자기 대파됐습니다! 대공 위협은 아닙니다!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탐지되지 않았습니다!"
대답하는 요원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무척 당황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최신형의 스텔스 대함 미사일일까? 하지만 아무리 스텔스 미사일이라 해도 명중할 때 까지 아무런 징후도 알 수 없었다는 건 말이 안됐다. 스텔스기라 해도 레이더에 가까이 접근하면 탐지되게 된다. 이지스 함이 5척이나 있는 이 함대를 미사일로 공격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설마 잠수함일까? 대공 위협이 아니라면 잠수함 밖에 없었다. 왓케인이 다시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혹시 잠수함인가? 그렇다면 대잠부서는 뭐한 거야! 싼타페는? 싼타페에선 무슨 연락 없나!"
싼타페는 로스엔젤레스급 공격원잠 SSN-763 Santa Fe 를 말하는 것이었다. 항공모함 전단에는 보통 1~2 척의 공격원잠들이 배속돼서 함대 호위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적 잠수함은 바로 이 공격 원잠으로 인해 함대를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공격 원잠을 먼저 칠 경우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키게 되고 그렇다고 원잠을 무시하고 항모에 직접 공격을 시도했다간 공격원잠의 밥이 되기 십상이었다.
-"아직까진 없습니다!"
"젠장! 우리 소나는! 대잠 팀은 전부 다 자고 있었나!"
-콰아앙!!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시 폭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왓케인은 고개를 들어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또 다른 함이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화기로 CIC 요원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벤더그리프트 굉침!! 적 잠수함의 징후는 포착 못했습니다!!"
밴더그리프트는 함대 외곽에서 대잠 경계를 서고 있던 올리버 하자드 페리급 프리킷 이었다. 왓케인 중장은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 잠수함이 대체 몇 척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어쨌든 놈은 함대 전체를 완벽하게 농락하고 있었다. 왓케인이 수화기로 CIC 에 명령을 내렸다.
"대잠헬기 전부 다 띄워!! 함대는 최대 속도로 전진! 항모의 대잠 초계기도 이륙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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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키티호크의 갑판이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요원들은 침몰한 두척의 호위함으로 부터 생존자를 구출하기 위한 구조 헬기들을 이륙시키면서 동시에 대잠 초계기인 S-3B 바이킹을 이륙시킬 준비를 하였다. 토잉카가 바이킹을 캐터펄트까지 끌고 가고 있었다. 그 동안 조종사와 부조종사, 그리고 잠수함 탐지 장비를 조작할 오퍼레이터 4명은 각자의 임무 장비를 체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갑작스런 비상사태에 이들도 경황이 없었다.
"유압 체크!"
조종사 마이크 대위는 절차에 따라 기체 각 부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부 조종사인 잭슨 중위의 행동이 좀 이상했다. 한시가 급한데도 그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짜증이 난 마이크는 잭슨의 어깨를 다소 거칠게 흔들었다.
"이봐! 잭슨! 내 말 안 들려? 유압 체크해!"
"으...으으...."
잭슨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설마 어디가 아픈 걸까? 그러나 기체에 탑승할 때 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어쨌든 어디가 아픈 거라면 임무 수행은 할 수가 없었다. 마이크는 관제실에 환자가 발생했다고 보고하기로 하였다. 바로 그 순간 잭슨의 몸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투둑! 찌직!!
"크..크으으!! 크아아아!!!"
갑자기 잭슨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그의 몸이 폭발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좁은 조종석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깜짝 놀란 마이크는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공포에 질린 그는 휴대하던 권총을 뽑아들려 하였지만 괴물로 변한 잭슨의 행동이 한발 더 빨랐다. 잭슨, 아니 괴물은 그 거대한 손으로 마이크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물먹은 스펀지를 쥐어짜듯이 그대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핼맷을 쓰고 있었지만 그 강한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나가 버렸다. 마이크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체가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면서 콕핏 글라스가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한창 발진준비를 하고 있던 갑판 요원들은 당황해 하였다. 그러다가 바이킹의 콕핏에서 괴상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다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댔다.
"뭐...뭐야!! 저게 뭐냐고!!"
"괴물이다!!"
갑판 요원들은 서둘러 기체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항모 경비팀을 부르려고 하였다. 그 때 이들의 눈에 경악스러운 것이 비쳐졌다. 비행 갑판위로 여러 마리의 괴물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같이 다들 처음 보는 모습의 괴물들뿐이었다. 이들은 바로 크로노스의 수중전용 조아노이드 들이었다. 이들은 바다 속에 숨어 있다가 함대가 접근하자 함체에 달라붙어서는 각 함으로 기어 들어간 것이다. 수중전용 조아노이드들은 항모 갑판위에 있던 갑판 요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사방이 온통 괴물이고 이들 요원들은 비무장이어서 조아노이드들에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비행갑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은 함교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해 있던 왓케인 소장은 황급히 전화기를 들어서는 함내 해병 경비팀에 출동을 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왓케인 소장은 CIC로 가기위해 서둘러 함교 밖으로 나갔다.
"크아아!!"
그 때 그들의 눈앞에 통로를 가득 채울 정도의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다. 어느새 괴물들이 바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당황한 그는 다시 함교로 돌아가서는 문을 걸어 잠갔다. 두터운 강철제 문이니 만큼 쉽게 들어오진 못할 것이었다.
-쿵!
그 순간 강철제 문의 가운데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바깥의 괴물이 문을 부수려 하는 것이었다. 당황한 그는 전화기를 들어 여기저기를 호출하기 시작했다. CIC 뿐만 아니라 격납고나 엔진실등 그야 말로 닥치는 대로 호출하였다. 결국 한 부서가 전화를 받았다. 캐터펄트 관제실이었다.
-"살려줘! 괴물!! 괴물이다아아!!!"
-"크아아악!!"
-"으아아!!"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괴물의 포효와 사람의 처절한 비명소리만 들려왔다. 왓케인 소장과 함교 요원들은 공포에 질렸다. 항모 곳곳에 괴물들이 출몰하고 있던 것이다. 수중전용 조아노이드들은 미리 각 함에 승선해 있던 육전형 조아노이드들과 합세해서 제7함대를 제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항모에 탑승해 있는 1개 중대 정도의 항모 경비부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마 그들도 지금 대단히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이제 그 어디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콰앙! 끼긱!!
함교의 문이 반쯤 떨어져 나갔다. 벌어진 틈 사이로 괴물의 무시무시한 손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힘을 주어 문틈을 벌리고 있었다. 왓케인 소장은 비로소 긴급 전문에 쓰여 있던 괴물이란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문자 그대로 진짜 괴물들의 공격이었던 것이다. 공포에 질린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공격이 개시되고 약 한 시간 후, 제 7함대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8월 17일 U.T.C. 08:30AM 한국 양평
"후우! 상부와는 뭐 연락 된 거 없나?"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어느 무선 채널도 전부 다 괴물들의 항복 강요 메세지만 흘러나옵니다."
한국군 제 21기계화 보병사단 야전 지휘본부에서 사단장 최강욱 소장은 통신참모의 보고를 들으며 답답하다는 듯이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곳곳에서 괴물들이 출현해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판국에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령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통신장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놈들이 어떻게 전시 통신망을 장악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군단으로 통하는 통신채널은 전부 다 괴물 놈들로 추정되는 자들의 항복 권유 메시지만 흘러나오고 있었고 만약을 대비해서 기록해 놓고 있던 상급 부대 지휘부 인원들과 통화할 수 있는 휴대폰까지 전부 다 불통이었다.
상황 파악이라도 하려고 TV나 라디오를 청취하기도 했지만 나오는 방송은 전부 이상한 메시지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들을 '크로노스'라고 칭하는 자들이었는데 오늘 세계 각지에 나타난 괴물들은 모두 '조아노이드'라 불리는 신인류들이며 이들은 오늘 바로 지구의 대 변혁을 위해 일제히 봉기했다고 알리고 있었다.
"국민여러분은 당황치 마시고 집안에서 차분히 기다리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저항중인 군과 경찰은 무의미한 싸움을 중지하고 다 함께 인류의 새 역사를 만드는데 동참해 달라고 방송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항복하라는 소리군. 젠장!"
최강욱 소장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고는 군화발로 거칠게 비벼 껐다. 상황이 불리한 건 알고 있었지만 항복만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기 부하들을 갈가리 찢어 죽인 놈들의 말 따위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 군인의 의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 바쳐 싸워야 했다.
괴물들은 제21기계화 보병사단의 전 예하 부대에 출몰하였다.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과 간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21사단은 역시 정예 중에 정예였다. 갑작스런 괴물들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장병들은 괴물들에 격렬히 저항하였다. 탄약을 제때 꺼낼 수는 없었지만 이들은 기지를 발휘해서 각 부대가 보유중인 기갑 장비들을 몰아서 그 괴물들을 깔아뭉개 버리는 식으로 저항하였다. 그리고 일단 괴물들을 진압하고 난 이후에는 상부에서 별다른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알아서 전시 작전 규정에 따라 행동하였다. 많은 인명피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두 시간 안에 출동준비를 마치고 지정된 집결 장소에 모인 것이다. 최강욱 소장은 그런 부하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인명피해가 극심했다. 각 대대들은 총 인원의 3~40% 가량의 인명피해를 낸 상태였다. 이 정도 인명 손실이라면 사실상 제대로 된 작전 수행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전차 대대들은 탄약수를 다른 보직에 앉히는 등의 응급조치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보유차량의 절반 정도밖에 끌고 나오지 못했다. 특히 35 전차 대대 같은 경우에는 피해가 너무 극심해서 전체 40대 가량의 보유 차량중 겨우 7대 밖에 가동시킬 수가 없었다.
기보(기계화 보병)대대 역시 피해가 극심했다. 이들도 보유 차량의 절반가량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이번에 새롭게 개발된 신형 K-21 보병전투차를 수령한 312기보 대대 같은 경우에는 단 열대 정도 밖에 나오지 못했다. 최 소장은 이것이 정말 뼈아팠다. 125기보는 사실상 최 소장이 가장 기대를 걸고 있던 부대였던 것이다. 이전까지의 K-200 장갑차와는 차원이 다른 성능을 가진 진정한 보병전투차였는데 그 부대가 본격적인 작전을 벌이기도 전에 와해 직전까지 몰린 것이다. 물론 대대에는 아직 무사한 장갑 차량들이 많았지만 그것을 운용할 인원이 없었다. K-200 이라면 다른 기보에서 인원을 파견해서 가동차량수를 끌어올려 보겠지만 (사실 다른 대대들도 여력이 없다.) K-21은 이번에 125기보가 맨 처음 수령한 최신형 장비인지라 다른 대대에는 운용 가능한 인원이 없었다. 실상 125기보조차도 아직 초기 운용단계였던 것이다.
그 밖에도 포병, 방공, 공병을 비롯해서 기타 지원부대들도 인명피해가 극심했다. 이들 역시 인원이 모자라서 정상적인 작전이 힘들었다. 특히나 포병 같은 경우에는 포병여단 본부가 거의 몰살당하다 시피해서 제대로 된 통합 지휘가 힘들게 되었다. 사단 항공대는 아예 보유하고 있던 헬기 전부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조종사 및 정비원들은 임시로 기보 대대에 소총수 등으로 편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밖에도 심각한 문제는 또 있었다.
"군단 ASP(탄약저장시설)에 보낸 부대는 어떻게 됐나? 탈환은 성공 한 건가?"
최 소장은 팔에 부목을 대고 힘겹게 서 있는 작전참모에게 물었다. 최 소장은 군단 ASP로 전시 탄약을 수령할 부대를 보내면서 호위 역으로 1개 전차 대대와 1개 기보 대대를 딸려 보냈다. 각 예하 부대에 빠짐없이 괴물들이 나타났으니 군단 ASP 같은 중요한 목표가 무사할리 없었다. 그래서 아예 '탈환'을 목적으로 대 부대를 보낸 것이다. 대부대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들도 전력이 충분치 않았다. 전차 15대, 장갑차 20대가 전부였던 것이다. 보낸 지 벌써 두 시간이 다 돼가고 있으니 지금쯤 뭔가 소식이 있어야 했다.
"전혀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무전망은 괴물 놈들이 교란하고 있고 간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핸드폰으로 걸어봐도 연락이 안 됩니다. 전령도 보내 봤습니다만....."
"그만 됐네."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뻔했다. 전멸한 것이다. 이동 중에 적과 조우했건 아니면 ASP에서 당했건 간에 어쨌든 그 부대는 놈들에게 당하고 만 것이다. 결국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이 이런 식으로 손실을 입고 말았다. 부사단장이 조심스럽게 최 소장에게 건의하였다.
"사단 전체를 ASP로 진격 시키시겠습니까?"
최 소장은 고개를 저었다. 탄약고에서 전차를 동원해서 교전을 벌이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었다. 물론 군단 ASP는 두터운 콘크리트 방호벽으로 보호되고 있고 각 탄약도 철저한 안전기준에 따라 보관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유폭 시키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만약 ASP가 정말 괴물들에게 점령당한 상태라면 놈들이 보관중인 탄약에 무슨 짓을 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21사단 전체 병력이 탄약을 가지러 안에 들어갔다가 시한폭탄이라도 터트리면 부대 전체가 전멸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안전하다고 강조해도 세상 어느 전차병도 탄약고에다 대고 120mm 포를 쏘는 간이 부은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전차포나 기타 중화기를 제외한 보병의 소총이나 기관총만으로는 놈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최 소장은 답답하다는 듯 담배를 또 하나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바닥에는 최 소장이 피워댄 담배꽁초들이 수두룩했다. 담배를 보면서 문득 그는 가족들 생각이 났다. 건강을 생각해서 제발 담배 좀 끊으라고 잔소리 해대던 아내와 자식들이 생각났다. 그 중에서 큰 딸은 시집 간지 이제 겨우 한 달 정도였다. 상대는 공군 전투기 파일럿. 군인의 아내가 얼마나 힘든 건지 아는 최 소장 내외는 처음에는 둘의 결혼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딸자식 이기는 아버지 없다고 둘의 끈질긴 설득에 최 소장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결혼식 날 정말 행복하게 웃는 딸을 보며 최 소장은 뿌듯함과 동시에 야속함도 느꼈었다.
사위의 얼굴도 떠올랐다. '장인어른의 부대 상공은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드리겠습니다.' 하며 호탕하게 웃던 사위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그래도 딸아이가 아주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었는데.... 군인인 이상 사위 역시 지금은 어딘가에서 전투 중일지도 몰랐다. 신혼살림 한 달 만에 딸자식이 과부나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각 예하 대대들은 현재 탄약 및 연료 보급을 마치고 대기 중입니다. 그러나 각 대대가 보유하던 비축 탄약만으로는 오래 싸울 수가 없습니다."
군수 참모의 보고에 최 소장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금은 가족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라를 위해, 국민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때였다. 군수 참모의 보고가 이어졌다.
"연료 역시 사정이 어렵습니다. 사단 보급대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상태인지라 추가적인 연료 보급이 어렵습니다."
물론 각 대대의 모든 차량들이 기동하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가동하지 않는 차량 몫의 연료와 탄약을 다른 가동 차량을 위해 돌리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땜질 처방은 얼마 가지 못한다. 원래 각 대대에 비축되는 탄약은 한두 번 교전할 수 있는 비상용의 수준이었다. 그 이상을 보관하고 싶어도 각 대대는 그럴 능력이 안됐다. 장기전을 하려면 군단 ASP에서 대량의 탄약을 수령해야 했다. 그러나 군단 ASP는 이제 이용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지. 각 대대에 탄약을 최대한 아끼라고 지시하게. 그리고 연료 같은 경우에는 가다가 민간 주유소에 협조를 구해 보는 수밖에. 뭐, 정 안되면 내 카드로 결제하자고. 하하하..."
분위기를 띄워 보려고 최 소장이 우스개 소리를 해 봤지만 잔뜩 굳은 참모들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최 소장은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어대며 탁자위에 펼쳐놓은 지도를 보았다. 지도를 보던 최 소장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였다. 이윽고 그는 결단을 내렸다.
"우리는 이제부터 서울로 진격한다!"
최 소장의 선언에 참모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상부로 부터 어떠한 지시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서울로 진격하자니! 참모들은 모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쿠데타로 오인 받을까봐 그러는 게 아니었다. 인구 천만이 넘는 대 도시를 1개 기계화 보병사단, 그것도 전력을 절반이상 손실당한 부대로 진격해 들어가자니. 너무 무모한 얘기였다. 게다가 병사들은 수색대대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시가전 훈련을 하지 못했다. 전쟁만 났다하면 시가전이 되기 일쑤인 이스라엘 군이나 본토에 대규모 훈련시설이 있는 미군과는 아무래도 숙련도 면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귀관들의 마음은 잘 알고 있다. 너무 무모한 일이지. 그러나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지금은 행동을 해야 할 때다! 가만히 앉아만 있다간 우린 어느 순간 포위당할 꺼다."
최 소장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내려오지도 못할 상부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다가는 결국 포위당해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을 지도 몰랐다. 게다가 군단이나 육군본부 등에서 어떠한 지시도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곳들 역시 괴물들에게 제압당했다는 뜻이다. 청와대라고 무사할 리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곳들을 지원해야 했다.
또한 아무리 괴물들이 곳곳에 출몰했다 해도 서울 인근에는 수도 기계화 사단 등의 강력한 부대들이 주둔하고 있다. 그들 역시 자신들처럼 서울 시내 곳곳에서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서울로 진격해서 현지에서 싸우고 있을 부대들을 지원하는 것이 나았다. 시간이 너무 지나서 그들이 제압당하고 괴물들이 전열을 재정비하면 승산은 없었다. 최강욱 소장은 참모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린 지금 당장 다른 사단과 합류해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수도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 전 부대는 서울로 이동할 준비를 하라! 지금 당장!!"
8월 17일 U.T.C. 03:00PM 미국 워싱턴
"현재 군대의 대부분이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습니다. 육군 전력은 전체의 70%, 해군은 74%, 해병대는 69%, 공군은 89%로 거의 전멸 직전입니다."
미국 제 43대 대통령인 조지 부시는 지금 워싱턴 근교의 지하에 위치한 견고한 벙커 안에서 참모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보고를 듣고만 있었다. 이곳은 과거 핵전쟁에 대비해서 미국이 건설한 수많은 지하 벙커중 하나였다. 사실 이곳도 그리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조아노이드들은 백악관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펜타곤에도 대량으로 출몰하였고 펜타곤의 경비 병력만으로는 갑자기 나타난 그 괴물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그 두 곳은 모든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부시 자신도 경호원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며 보호해 준 덕분에 이곳까지 무사히 대피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시설로는 세계 각지에 흩어진 모든 미군과 본토 병력을 지휘하기에는 통신시설이 너무나 빈약했다. 사실 원칙대로라면 충분한 통신시설이 있는 전시 지정 지하기지로 가거나 핵전쟁에 대비해 개발된 보잉 E-4 공중지휘기에 탑승해야 했지만 지하기지는 고사하고 공항까지 가는 것도 너무 위험하다는 주위의 만류에 따라 워싱턴 근교의 임시벙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대통령 일행을 데리러 전용 헬기가 백악관 마당에 착륙을 시도하다가 괴물들이 발사한 레이저 빔을 맞고 격추되기 까지 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상 부시 대통령과 참모진들은 이 작은 벙커에 갇힌 셈이었다.
"그리고 본토 각지에 있는 주방위군이나 경찰조직과도 전혀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기타 행정조직들도 사실상 마비 상태입니다. 현재 연락이 유지되고 있는 군부대의 현황은..."
"이제 그만! 그만 됐네."
대통령은 참모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았다. 보고를 계속 듣고 있다간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상황은 누가 봐도 절망적이었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진 미합중국의 역사가 이렇게 하루도 안돼서 허무하게 끝나다니, 부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놈들은…… 그 괴물들은 뭐야...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 숨어 있었길래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는 거냐고....!"
부시는 머리를 감싸 쥔 채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들키지도 않고 숨어있을 수 있을까. 그건 부시뿐만이 아니라 모든 참모진들이 다 생각하는 의문이었다. 그 때 상황보고를 하고 있던 참모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바닥에 팽개쳤다. 그리고 대통령과 보좌진들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렇게 알고 싶으십니까? 대통령."
-투둑! 찌이익!
갑자기 참모의 얼굴이 흉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몸집이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입고 있던 옷이 다 찢어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대통령과 참모진들은 경악하였다. 저 놈 역시 괴물이었던 것이다!
"자...자네는...!!!"
충격을 받은 부시는 말을 제대로 잊지 못했다. 다른 참모들도 공포로 모두 바짝 얼어붙었다. 조아노이드로 변신한 참모는 대통령 일행이 알고 싶어 하던 의문의 해답을 가르쳐 주었다.
"우린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들 곁에 있었어."
8월 17일 U.T.C. 05:40PM 미국 애리조나 크로노스 본부 기지
애리조나 주에는 대자연의 경이라고 불리는 '그랜드 캐니언'이 있다. 미국 애리조나 주(州) 북부에 있는 거대한 협곡(峽谷)으로 이루어진 곳으로서 길이 350km(리틀 콜로라도 강의 합류점에서 미드 호까지), 너비 6~30km, 깊이 약 1,600m 의 방대한 곳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협곡은 콜로라도 강이 콜로라도 고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곳에 형성되었다.
바로 이곳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 한 곳 지하에 크로노스의 비밀 기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산 내부 전체와 지표에서 지하로 약 5Km 정도를 더 파내고 구축된 이 거대한 지하 기지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크로노스의 지부들을 총괄 지휘하는 본부 기지였다. 그리고 이곳은 크로노스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크로노스에게는 성지(聖地)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북미 지역 제압완료!"
-"남미 지역 제압 진행 중. 제압률 약 90%."
-"아프리카 지역 제압 완료!"
-"오세아니아 지역 제압 완료!"
-"유럽 지역 제압 진행 중. 제압률 약 83%."
본부 기지 최하층부에 위치한 12신장 전용 회의실인 이곳 '천구의 방'에서는 지금 12신장 멤버중 이곳 북미 지구를 담당한 신장멤버인 '신 R. 암니컬스' 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신장 멤버들은 각자의 담당 구역으로 흩어져서 제압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신은 이곳 본부기지에서 원래 맡은 지역인 북미지구 뿐 아니라 다른 지역도 총괄 지휘하는 역할을 부여 받았다.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들으며 신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압전이 시작된 지 이제 17시간 째. 낙승을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제압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 세계의 정부와 군은 마비상태에 빠져서 조직적인 저항을 전혀 못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각지에 고립된 군부대들이 절망적인 저항을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는 없었다. 한 두 군데에 불과했지만 일부 군부대가 보유 중이던 전술핵을 터트렸다는 보고도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이성을 잃은 인간들이 차라리 다 같이 죽자며 가지고 있는 핵폭탄들을 터트려 버리면 곤란했다. 장차 크로노스가 통치할 이 별을 방사능으로 뒤덮을 수는 없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제압은 신속하게 이루어 져야 했다.
발카스 박사가 혹시 모른다며 주의하라고 지시했던 천상계의 공격은 예상과는 달리 없었다. 발카스는 일본에서 가이버들과 싸울 당시 천상계의 여신들이 가이버들과 함께 있는 것이 확인 됐었다고 말해 주었다. 강림자의 기록은 신도 봤고 그래서 천상계의 신들의 존재도 알고 있었기에 여신들이 여기 지상계에 내려온 게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이 가이버들과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웠다. 제압전이 시작되기 전 발카스는 모든 신장 멤버들을 모아놓고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혹시 천상계가 개입해 올지도 모르니 충분히 조심해 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하긴 미나카미 산에서 유적 우주선과 가이버들을 처 부술 당시 여신들도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고 그걸 복수하려고 천상계의 군대가 내려올 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제압전이 마무리 되가는 현재까지 그런 징후는 보고되지 않았다.
-"서아시아 지역 제압 진행 중. 제압률 약 87%."
-"러시아 지역 제압완료."
-"동아시아 지역 제압 진행 중. 제압률 약 72%."
그 보고를 들은 신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동아시아 지역의 제압률이 낮았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오늘 밤을 넘길지도 몰랐다. 물론 제압이야 하겠지만 24시간 안에 제압을 마무리 한다는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것만 같았다. 신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물었다.
-"중국, 일본의 군 세력은 제압완료 했습니다만 유독 한국과 북한의 저항이 거셉니다. 두 지역의 제압률은 각각 68%와 75% 입니다."
보고를 들은 신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두 나라 모두 전쟁 대비만 반세기가 넘게 준비해 왔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국력에 비해 너무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던 나라들이고 국민성 자체도 상당히 끈질긴 자들이었다. 신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제압이 완료된 일본과 중국에서 잉여 병력을 차출해서 급파하라. 작전 완료 예정시간까지 반드시 제압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8월 17일 U.T.C. 06:19PM 한국 서울 근교
제21기계화 보병사단 소속 전차들은 전조등을 켠 채로 서울 외곽에서 대기 중이었다. 최초 출발부터 무려 9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이들은 서울 외곽에 진입할 수 있었다. 도로로 쏟아져 나오는 피난민 차량들 때문에 기동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궤도 차량들은 도로를 무시하고 달린다 쳐도 일반 트럭으로 구성된 보급 차량들은 그 뒤를 쫓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로를 이용할 수밖에는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이동 중에 조아노이드들과 격렬한 근접전을 치루기도 하였다. 주로 후방에 위치한 보급 차량들이 타깃이 되는 바람에 이들을 구원하느라 부대 전체의 진격이 정체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악전고투 끝에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그나마 부족한 전력에서 이미 10% 의 장비손실과 30%의 인명손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주로 기보대대의 하차 보병들의 피해가 컸다.
"뭐 연락 들어온 거 없나?"
"아까 나왔던 수기사 예하 기보대대와의 무전 이후로는 없습니다."
통신참모의 보고를 들은 최강욱 소장은 연신 줄담배를 피워대었다. 30분 전쯤에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수도 기계화 보병사단 예하 기보대대와 무전 연락이 된 적이 있었다. 최 소장을 비롯한 참모진들은 아직 서울이 넘어가진 않았다며 환호하였지만 그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수기사 351 기보 제3중대장이라고 자신을 밝힌 상대방은 병력손실이 막심하며 대대는 사실상 전멸 상태라고 얘기하였던 것이다. 상급부대는 물론 인근의 다른 부대와도 연락이 완전히 두절됐으며 현재 괴물들이 또 몰려오고 있다며 다급한 목소리로 지원을 요청했었다. 그 짤막한 통신을 끝으로 무전망은 또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젠 괴물들의 항복 권고 메시지조차도 안 나오는군."
"이젠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는 건지도 모르죠. 항복 따위는 아예 안 받겠다는...."
작전참모의 말에 참모진 모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항복 권고 메시지조차 없이 아주 조용한 무전망이 오히려 이들을 더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만 같았다. 최 소장은 서울 도심 쪽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휘황찬란한 야경은 온데간데없고 도심은 암흑 속에 싸여 있었다. 총소리나 폭탄이 터지는 섬광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수도 방위 사령부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은 제압된 게 틀림없었다. 최 소장은 너무 늦게 왔다며 자책하였다.
"서울로 진격해 들어가시겠습니까?"
참모들의 물음에 최 소장은 그저 담배만 뻑뻑 피워대었다. 최 소장은 이미 늦었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치고 들어갈 거면 서울 시내에서 군대가 저항중일때 들어갔어야 했다. 지금쯤 놈들은 21사단의 존재를 알고 도심 곳곳에 매복해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계속된 전투와 행군으로 병사들은 잔뜩 지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시가전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들을 어둠속의 도심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지금 시각은 새벽 3:19. 두어 시간 후면 동이 틀 것이다.
"동이 틀 때까지 휴식을 취한다. 각 예하 부대에 전달하게."
최 소장의 결정에 참모진 모두가 동의하였다. 지금 야간전은 너무 위험했다. 차라리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는 아침에 공격을 시도하는 게 나았다.
8월 17일 U.T.C. 07:00PM 한국 서울 근교 제21 기계화 보병사단 예하 제35 전차대대 숙영지
사단장은 쉬라고 지침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푹 늘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각 단차별 상태 점검과 재급유, 탄약 재분배 등으로 35전차 대대 숙영지는 한창 바빴다. 다들 계속된 야간 행군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한 시간 후에는 다시 전투가 시작될 예정이었으므로 서둘러 작업을 하고 있었다.
35전차 대대는 원래 대대 정수에서 한참 모자라는 7대의 전차밖에 가동하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대대장을 비롯한 대대 본부인원들은 거의 몰살당했고 장교도 지금 임시 대대장직을 맡고 있는 2중대장과 소대장들을 다 합쳐도 겨우 3명밖에 없었다. 사실상 대대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으로 까지 떨어져 버렸고 이 때문에 평소 전시 작전 계획대로 병력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지금 똑같이 큰 피해를 입은 125기보와 517 방공대대와 함께 임시 전투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3개 대대가 합쳤는데도 불구하고 전체 병력은 2백 명을 간신히 채우고 있을 정도였다.
"식사하십시오!"
4호차 막내인 탄약수 정일호 일병이 반합에 전투 식량 봉지를 담아 가지고 왔다. 제35 전차대대 제3중대 1소대 4호차의 승무원들은 전날 아침 식사 후 지금까지 거의 16시간 만에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뜨거운 물에 데우기만 한, 제대로 조리한 식사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전투식량이지만 이것도 지금은 감지덕지 했다. 4호차 승무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전투 식량 봉지를 뜯었다. 그런데 전차장인 박후열 하사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전투 식량에는 손도 대려 하지 않았다. 포수 전태윤 병장이 박 하사의 안색을 살폈다. 위장크림으로 안면위장을 한 상태였지만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신 겁니까?"
"괜찮아....좀 졸려서 그래...."
그러고 보니 박 하사는 어제 밤 일직근무를 섰었다. 게다가 일직 소대장은 그 깐깐하기로 유명한 3소대장이었으니 중간에 요령껏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밤을 꼴딱 세운데다가 일직 근무를 마치고 오전동안 잠을 제대로 잤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전차 상태 문제 때문에 근무취침도 못하고 불려가서 신나게 깨진 직후 비상이 걸렸으니 박 하사는 어제 밤 10시부터 지금까지 30시간이나 잠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4호차 탄약수인 정일호 일병은 인원이 부족해서 다른 전차에 포수로 불려가고 말았기 때문에 행군간에 요령껏 쉴 수도 없었다. 탄약수의 부재로 인해 사주경계가 취약해 지기 때문이었다.
"대충 점검은 끝났으니까 좀 주무십시오. 경계는 제가 서겠습니다."
"하지만 너도 피곤하잖아. 나만 잘 수는...."
"에이, 전 일직 근무는 안 섰잖습니까. 끄덕 없슴다."
그렇게 말하면서 전 병장은 전투 식량을 우물거리면서 다시 전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포탑 안으로 들어가서 전차장 석에 앉아서 CPS를 야간 모드로 조작하면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제 병장 2호봉. 전차장석 기기조작도 능숙한 전 병장이었다. 전 병장은 전투 식량을 먹으면서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녹색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응? 이게 뭐지?"
그 순간 화면에 뭔가가 꾸물거리는 듯 한 모습이 비쳐졌다. 전 병장은 배율을 좀 더 확대해서 그것을 자세히 보았다. 그 순간 그는 그 꾸물거리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경악하였다. 괴물들이 그야말로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적이다!!"
-터터텅!!
전 병장이 해치로 몸을 내밀면서 적이라고 소리침과 동시에 같이 숙영 중이던 312기보의 K-21 보병전투차의 40mm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그들 역시 떼로 몰려오고 있는 조아노이드를 발견한 것이다. K-21 보병 전투차는 연거푸 40mm 고폭탄을 조아노이드들에게 날리고 있었다. 전 병장은 서둘러 포수석에 앉았고 박 하사와 조종수 황두식 상병도 황급히 전차에 탑승하였다. 두 사람이 탑승한 것을 확인한 전 병장은 포탑을 괴물들이 몰려오는 방향으로 돌렸다.
"조준 끝!"
"쏴!!"
-퍼엉!!!
K1A1 전차의 120mm 활강포가 불을 뿜었다. 미리 장전돼 있던 대탄(대전차 고폭탄)이 조아노이드의 선두를 강타하였다.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몇 마리의 조아노이드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다른 전차들에서도 조아노이드들을 향해 주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전차포의 강렬한 섬광과 엄청난 폭음이 주둔지를 뒤흔들고 있었다.
-철컹!
"장전 끝! 쏴!!"
포탄 장전을 마친 박 하사가 바로 사격 명령을 내렸다. 전 병장은 바로 주포를 사격하였다. 폐쇄기가 열리면서 역한 화약 냄새가 포탑 안을 가득 채웠다. 탄약수가 없기 때문에 지금 전차 지휘를 해야 하는 박 하사는 탄약수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다. K1A1 은 수동 장전 방식, 자동장전장치를 가지고 있는 T-80U 나 현재 개발 중인 차기 전차라면 이럴 일은 없었다. 지금은 전 병장이 시야가 좁은 포수 조준경으로 수색과 공격을 도맡아 해야 했다.
"장전 끝!!"
-퍼엉!!!
포를 쏘면서 전 병장은 욕지거리를 내 뱉었다. 전차들과 보병전투차, 방공대대의 자주 대공포까지 가세해서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는데도 놈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전혀 위축되는 모습도 없었다. 괴성을 지르며 막무가내로 돌진해 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소름이 끼쳤다. 대체 저 놈들은 죽는 게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거리 700m !!"
레이저 거리측정기에 나타난 선두 괴물 군과의 거리를 본 전 병장이 비명을 질렀다. 둔한 놈들도 있지만 발이 엄청 빠른 놈들도 있었고 그놈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최초에 놈들을 발견했던 거리는 1800m. 이 놈들은 1km 가량을 날듯이 주파해 낸 것이다! 전 병장은 선두 집단을 조준하고 다시 주포를 발사하였다.
-퍼엉!!
-두두두두!!!
방공대대의 비호 자주대공포가 30mm 기관포를 난사하며 발이 빠른 조아노이드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K-21 보병 전투차의 40mm 포도 촘촘하게 탄막을 형성하였다. 차량 숫자는 적지만 지금 이들은 사단에 배치된 기갑차량 중 가장 최신형들만 모여 있었기에 그 화력은 막강한 수준이었다. 35대대의 K1A1의 120mm 활강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한 무리의 조아노이드가 쓰러져갔다. 이 정도라면 해 볼만 하다며 전 병장이 환호하였다.
-콰아앙!!
그 순간 갑자기 바로 옆에 있던 보병 전투차 한대가 대 폭발을 일으켰다. 포탑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면서 탑재돼 있던 탄약들이 유폭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조종수 황두식 상병이 비명을 질렀다.
"옆에 있던 기보 장갑차가 당했습니다! 뭔가가 사격을 해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깜짝 놀란 박 하사는 다시 전차장 석으로 복귀해서 CPS로 주변을 관측하였다. 그 순간 열영상 디스플레이에 정체불명의 한 줄기 빛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또 다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앙!!
이번에는 좀 떨어진 곳에서 사격 중이던 자주 대공포였다. 탄약이 유폭되면서 거세게 불길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조종수가 비틀거리며 차량 밖으로 탈출하는 것이 보였다. 박 하사는 이윽고 그 빛이 날아온 곳을 찾아내었다.
"3시!! 3시 방향 능선이다!!"
전 병장이 서둘러 포탑을 그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조준경에 얕은 언덕위에 잔뜩 올라가 있는 괴물들의 무리가 보였다. 그 놈들은 다른 조아노이드들 처럼 돌격해 오지 않고 언덕 위에서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양쪽 어깨가 이상하리 만치 부풀어 오른 놈들이었다.
-"대대 전 전차는 3시 방향 능선을 포격하라!! 놈들이 레이저를 날리고 있다!!"
그 순간 대대 무전망으로 임시 대대장인 2중대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즉시 전차 7대가 포탑을 그 쪽으로 돌렸다. 전 병장이 그 쪽을 조준하는 순간 능선에 있던 조아노이드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는 것이 보였다. 놈들이 날린 레이저의 섬광이 디스플레이를 가득 메웠다. 전 병장은 공포에 질려 두 눈을 질
댓글목록

카렌밥♡님의 댓글
카렌밥♡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흥미는 있지만... 밀리터리 색채도 띄는 만큼 amg 내에서 크게 관심을 보일 회원분들은 많지 않을 것 같군요. 장르 소설의 한계겠죠. 돌이라면, 약간의 오타가 있다는 거구요.
구지 설정상에 태클을 달자면 도쿄 내에서는 400m 이상의 빌딩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신쥬쿠의 도쿄도청사가 있는 곳이라면 이미 40~50층의 신식 건물이 있는 탓에 새로 지을 위치도 없구요. 만약 무리해서 짓는다고 한다면 도쿄도청사 내의 전망대의 조망권이 피해를 받죠. 관광수입이 상충되는 위치라 신쥬쿠에 400m 빌딩은... 그리고 대형 전광판.
이건 새로 설치됬다고 볼 수 있으니 패스. 밀리터리 설정쪽은 제가 그 분야의 관심도가 높지 않아서 역시 패스. 글로만 보자면... 저는 흥미롭게 봤습니다. 약간 내용 설명이 늘어진 탓에 진부해지기도 했습니다만, 이건 제 취향이 이쪽이 아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거 같아요. 아, 크로노스에 관해서 더 묘사를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정말 열심히 쓰신게 눈에 보입니다.
이렇게 밖에 댓글을 달아드리지 못하니 죄송하네요. 역시 위에서 말했던거지만 밀리터리 색이 있는 탓에 읽는 층은 제한 될 수 밖에 없고, 거기에 팬픽성까지. 두루 읽히시고자 하신다면 고생하실지도...


가이버님의 댓글
가이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카렌밥//한글로 오타 검색을 하는데도 오타가 나오는 군요. 이런...orz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신주쿠의 클라우드 게이트 문제는 크로노스의 비밀 공작으로 인해 건설허가가 나왔다는 설정입니다. -.- 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부기관 곳곳에 자기들 조직원을 심어왔으니까요. 1부 3편에 저 클라우드 게이트가 인허가 과정에서 부터 건설중일때도 말들이 많았다고 간단히 언급했었죠. ^^;;;
하지만 고도제한 문제는 전혀 몰랐습니다. -_-;;; 뭐, 클라우드 게이트의 높이는 가이버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겁니다. 원작자이신 타카야 요시키님이 알면서도 쓴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셨던 건지는 모르겠군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