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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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part 2.-
제7화 - 검은 거인식장 -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베르단디는 하야미에게 차를 권하면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그녀의 바램대로 1년 전에 헤어졌던 하야미가 무사히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기쁜 것은 베르단디 뿐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하야미의 무사 귀환을 반겼다.
"자, 앱톰씨도 홍차 한 잔 드세요."
베르단디는 앱톰에게도 홍차를 권했지만 그는 팔짱만 낀 채로 그저 무시할 뿐 이었다. 그래도 베르단디는 개의치 않고 앱톰의 바로 앞에 홍차를 놓았다. 베르단디는 앱톰도 귀한 손님처럼 대접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앱톰의 눈치만 보며 쭈뼛거리고만 있었다. 울드는 앱톰을 전혀 개의치 않는 베르단디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자기 동생이라지만 -비록 모친은 달라도- 1년 전에 케이와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던 녀석에게 웃으면서 홍차 한 잔 드세요 라니.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베르단디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기가 막힌 울드였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요? 모두 무사하신가요?"
지로가 하야미에게 다른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다. 순간 하야미의 얼굴에 짙은 슬픔이 나타났다. 하야미는 침울한 표정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모두....죽었습니다."
"예? 그..그런! 어쩌다가요!"
"바이러스를 극복하려다가 그만...."
하야미는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나갔다.
하야미를 비롯해서 크로노스에서 미조제 상태로 연구 활동에 종사하던 연구원들은 모두 그 체내에 특수한 바이러스를 강제로 주입받았다. 이 바이러스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폭발적으로 증식, 뇌 세포를 완전히 파괴해 버리게 하는 무서운 바이러스로 미조제의 스텝들이 배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심어진 것이었다. 이 바이러스를 제거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조제를 받아 조아노이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크로노스에 반기를 들 결심을 했던 하야미를 비롯한 유적기지 최하층 스텝들에게는 그건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모든 희망을 걸고 시도했던 바이러스 증식 억제용 왁찐의 배양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크로노스의 발아래에서 복종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들은 왁찐의 배양이나 조아노이드 조제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그 방법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 방법이란...."
"손종 실험체로의 조제지."
그 때 뒤에서 묵묵히 하야미의 말을 듣고 있던 앱톰이 끼어들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손종 실험체는 조아노이드 조제 과정에서 어떤 요인에 의해 조제가 실패해서 생겨나는 일종의 돌연변이야. 그 때문인지 손종 실험체들 중에는 조아로드의 사념파를 받지 못하는 녀석들도 생겨나지. 바로 나 처럼."
"그...그렇다면 하야미씨는..!"
앱톰의 말을 들은 모두는 믿기지 않다는 눈으로 하야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손종 실험체로 조제되었습니다."
오다기리를 포함한 스텝들이 내린 최종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손종 실험체로의 조제. 일단 조제를 받게 되면 바이러스는 그대로 무력화가 된다. 그러나 '불량품'인 손종 실험체가 되기 때문에 조아로드의 사념파에 지배당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말이 쉽지 이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손종 실험체는 조아노이드 개발이나 통상 조제과정에서 어떤 돌발변수에 의해 생기는 것, 다시 말해 우연히 생기는 것이다. 그런걸 일부러 만들려면 조제 과정을 고의로 틀려야 한다. 제대로 만들어도 위험이 있는 것이 조제행위인데 고의로 실패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손종 실험체를 일부러 만드는 건 이제까지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다기리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이것을 반대했다.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적기지에서 탈출한 후 더 이상 왁찐을 얻을 수 없게 되자 남은 스텝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들은 모처에 몰래 준비한 간이 조제시설을 이용해서 손종 실험체의 조제를 시도하였다. 바로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서, 목숨을 건 생체실험을 시도한 것이다.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고 한 사람씩 차례로 조제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앞의 동료를 조제하면서 얻은 데이터를 다음 순서에 반영해 가며 이들은 실험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결국 살아남은 건 맨 마지막 순서였던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동료들을 조제하면서 얻은 데이터가, 동료들의 혼이 절 살려준 거죠...."
모두는 숙연해 졌다. 크로노스에게 얌전히 길들여지며 사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의 주박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처절히 몸부림친 그들의 죽음에 다들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한동안 모두는 말이 없었다. 바로 그 때였다!
-촤르륵!
갑자기 앱톱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창문의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이제까지 행여나 누가 볼까봐 함부로 커튼을 젖히지 않고 살아왔던 모두는 앱톰의 갑작스런 행동에 크게 놀랐다. 그러나 모두가 뭐라 하기도 전에 앱톰이 자신의 오른 손을 생체 열선포 발사기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다짜고짜 밖으로 생체 열선포를 발사 하였다.
-푸슝!
앱톰이 열선포를 발사한 쪽을 바라본 모두는 깜짝 놀랐다. 이들이 살고 있던 집 건너편에 어느 건물 옥상 위에서 조아노이드 한 마리가 박살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모두는 직감하였다. 이곳을 들킨 것이다!
"젠장! 척후 조아노이드인가!"
앱톰은 혀를 찼다. 아까 그 놈은 척후 조아노이드로서 시각과 청각이 정찰 임무에 맞게 극도로 강화된 종이었다. 분명히 여기 들어오기 전에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면서 수상한 놈들이 있나 없나 살펴보고 들어왔는데도 그만 들키고 만 것이다. 도대체 여길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안되겠어! 다들 빨리 여길 뜨자. 들켰다면 이대로 있는 것은 위험해."
아키토가 모두에게 도망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린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미 늦었다. 벌써 포위당했어."
린드는 정신을 집중하며 주변의 기를 느꼈다. 보통의 인간과는 확실히 다른 조아노이드의 반응. 게다가 그것들 모두가 이곳을 포위하는 형태로 배치돼 있었다. 놈들은 어느 틈에 이곳의 위치를 확실히 파악하고 퇴로를 차단한 것이다. 이대로는 이곳에서 교전이 벌어지게 생겼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무 죄도 없는 일반 시민들까지 말려들게 된다.
"숫자는 전부 4마리군."
앱톰 역시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조아노이드의 기를 느꼈다. 처음 보는 형태의 조아노이드의 파동. 아무래도 이번에 새로 나온 신형인 것 같았다. 하지만 겨우 네 마리라니. 아무리 신형이라 할지라도 겨우 이정도 수라면 자신 혼자서도 충분히...
'아냐! 뒤에 놈들 말고 또 있다! 이건....!"
그 순간 앱톰은 이들 신형 조아노이드 말고도 뒤쪽에 다수의 조아노이드가 포진해 있는 것을 눈치 채었다. 숫자는 대략 열 마리. 이 반응이라면 틀림없이....생체 열선포 탑재 조아노이드, 바모아다! 앱톰이 케이들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런 젠장!! 가이버! 빨리 변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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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슝! 퓨슈웅!!
생체 열선포를 열심히 충전하고 있던 바모아 부대가 케이들이 숨어 있는 은신처 건물을 향해 일제히 레이저를 발사하였다. 바모아들이 발사한 무수히 많은 레이저가 건물의 이곳저곳을 뚫고 들어갔다.
-콰콰콰쾅!!!
그 순간 원룸 건물 전체가 대 폭발을 일으켰다. 바모아들이 날린 열선포가 건물 내의 가스관을 파괴한 것이다. 폭발로 인해 인근에 있던 다른 건물들도 폭발 충격으로 인해 유리창들이 전부 깨져 버렸고 불까지 옮겨 붙고 말았다. 근처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건물이 폭파되면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위이이잉!
"사...살았다!"
그러나 케이들은 모두 무사했다. 위기의 순간 케이는 즉시 기간틱으로 변신해서 일행 모두를 바리어로 지켜낸 것이다. 케이가 만들어낸 바리어의 푸르스름한 막 안에서 모두는 치를 떨었다. 이 건물에는 그들 말고도 아무 관계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어서 모두 다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베르단디의 얼굴은 아주 새파래져 있었다.
"케이씨! 사람들이...! 다른 분들이...!"
"알고 있어! 우선은 여길 빨리 벗어나야 해!"
케이는 즉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여신들은 각자 날아올랐고 그 외 보통 인간인 시즈와 요헤이, 지로, 핫세, 메구미, 하야미 등은 케이와 아키토, 앱톰이 각자 맡았다. 법술 비행이 아직 많이 미숙한 스쿨드는 베르단디가 안아 들었다. 어쨌든 여기서 싸움을 벌일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벗어나야 했다. 하늘 높이 떠오른 이들은 전 속력으로 시 외곽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날 수 없는 바모아 들은 이들의 도주를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촤악!
그러나 바모아 말고 케이들의 은신처를 포위하고 있던 네 마리의 신형 조아노이드들은 달랐다. 이들은 등의 장갑판 속에 숨겨져 있던 곤충형의 날개를 전개해서는 하늘로 날아올라 케이들을 바짝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감지한 케이들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젠장! 저 녀석들은 비행도 가능한 놈들이군. 신형인가!"
"마키시마 선배! 게다가 이 파동은 설마....!"
"아아, 그래. 그 때 그 녀석들과 비슷해. 그 지긋지긋한 '엔자임'들과 말이야!"
엔자임! 그 공포의 대 가이버용 조아노이드. 강식장갑 분해 효소 때문에 접근전 자체가 불가능한 것도 문제고 기본 능력 자체도 대단히 우수한, 그야말로 가이버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조아노이드. 그 것의 최신형 버전이 나타난 것이다. 아무튼 빨리 시 외곽 쪽으로 벗어나서 지상에 착륙해야 했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지로들을 안아든 채로 공중전을 할 수는 없었다. 케이들은 속도를 더욱 더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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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비행한 끝에 케이들은 드디어 시 외곽 쪽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까지도 엔자임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케이들을 쫓아오고만 있었다. 마치 함정으로 사냥감을 유인하는 사냥개들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모두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케이와 아키토의 헤드 센서에 아주 강력한 반응이 캐치되었다. 반응의 방향은 케이들의 바로 앞. 게다가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틀림없이 조아로드다! 역시나 저 엔자임들은 케이들을 조아로드가 기다리고 있는 함정으로 몰고 가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케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과연 어떤 상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그 때 날아가던 이들의 눈앞에 허공에 떠 있는 그림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자세히 본 케이는 경악하였다. 전투 형태로 변신해 있는 무라카미였다!
"어서 와, 케이. 기다리고 있었어."
"무라카미 씨!!"
케이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케이는 난감함을 느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무라카미를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은 도주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지금 케이들은 공중전을 벌이기에는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일행들 중에서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케이와 아키토, 앱톰은 지금 하늘을 날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을 각각 안고 있었다. 무라카미는 그런 케이들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런 혹덩어리들을 안은 채로 나와 싸울 건가?"
그리고 무라카미는 손짓으로 지상을 가리켰다. 땅으로 내려가자는 의미였다. 후방은 엔자임들이 막고 있고 전방의 무라카미 역시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케이는 별 수 없이 지상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행들 역시 케이를 따라 지상으로 강하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무라카미와 신형 엔자임들 역시 땅으로 내려갔다. 이들이 하강한 곳은 어떤 외딴 숲 속이었다. 숲 한가운데를 조그만 개천이 관통하며 흐르고 있었다. 여름 피서삼아 오기는 괜찮은 곳이긴 하지만 지금 이들에겐 잘못하면 죽을 장소가 될 지도 몰랐다.
"이거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여신님들."
무라카미는 베르단디들을 보며 웃으며 인사하였다. 그러나 베르단디는 그런 무라카미의 인사에 답해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예전의 무라카미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자기 품에 안겨있는 스쿨드를 꼭 끌어안았다. 무라카미는 잠시 일행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다들 건강하신 것 같군요. 지로씨도 시즈씨도 요헤이 할아버지도. 응?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얼굴도 한 명 끼었군 그래."
무라카미는 메구미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케이의 친동생이라 해도 케이가 가이버가 됐을 당시에는 크로노스와의 사건에 말려든 적이 없었으니 무라카미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메구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술과는 인연이 없는 그녀조차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살기를 무라카미가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라카미는 계속해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그는 시선을 멈췄다. 커다란 안경을 끼고 있고 조그만 체구의 소녀, 핫세였다.
"핫세도 오랜만이야. 그래, 잘 지냈어?"
"저...정말 무..무라카미씨 맞나요?"
핫세는 잔뜩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무라카미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 손을 핫세를 향해 뻗으며 말했다.
"자, 핫세. 이리와. 넌 거기 있을 필요가 없어."
"예? 무..무슨 말을..."
"옛날에 유적 기지에서 날 간호해 줬던 빚을 갚으려는 거야."
핫세는 여전히 무라카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라카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난 알고 있어. 핫세 너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야. 저런 녀석들 틈에 끼어서 된서리를 맞을 필요는 없어."
"되...된서리..라뇨?"
"엄마, 아빠. 보고 싶지 않아? 나라면 보게 해 줄 수 있어. 너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고."
그 순간 핫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니! 자유를 얻을 수 있다니! 지난 1년간 숨어살면서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소원. 엄마, 아빠를 만나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리고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니는 것. 크로노스에게 납치되기 이전의 평범한 일상으로의 회귀.
"이래봬도 지금의 나는 12신장이라고. 너 하나 쯤 수배 해제시키는 거 어렵지 않아."
"저..정말인가요? 정말로 자유를 주시는 건가요?"
"물론이지."
핫세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모두들 핫세를 주목하고 있었다. 다들 긴장된 얼굴로 핫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핫세는 조심스럽게 무라카미에게 다시 물었다.
"저...그러면 다른 분들도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아니. 천만에. 한 명도 살려둘 수 없어."
그러나 무라카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핫세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핫세의 안색은 다시 창백해 졌다. 무라카미는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며 말하였다.
"뭐, 케이와 아키토는 가이버니까 당연히 척살 대상이고. 여신님들도 말할 것도 없지. 그녀들의 존재는 분명 성가시니까 말이야. 천계에 증원을 부른다던지, 아니면 직접 싸우던지. 어쨌든 우리 크로노스에게 협력할 뜻은 전혀 없겠지. 그리고 지로씨 역시. 당신 성격에 순순히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라카미를 사납게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걸로 지로의 대답은 나왔다. 무라카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시즈와 요헤이를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굳은 얼굴로 무라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키토가 척살된다면 시즈씨와 요헤이씨도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지.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랑 싸우려고 할껄? 그리고 저기 있는 앱톰이란 실험동물 녀석이야 뭐 당연히 없애야 하는 벌레 녀석이고. 거기 아가씨는 어때? 살고 싶다면 엎드려 빌라고. 그럼 봐 줄 수도 있어."
무라카미가 말한 사람은 메구미였다. 물론 메구미의 대답은 확고했다.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차라리 죽이시지 그래. 너희에게 엎드려 비는 건 죽음보다 더 싫으니까 말이야."
무라카미는 마지막으로 하야미를 보았다. 하야미는 1년 전과 전혀 달라져 버린 무라카미의 태도에 적잖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야미씨도 살려둘 수는 없지. 우리 크로노스의 어두운 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가이버들과 함께 최우선 제거 대상이군."
"당신...당신 정말로 무라카미가 맞는 거요? 오다기리 주임님의 죽음은 잊은 겁니까! 당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던 그 분의 뜻을 저버린 겁니까!"
"지금의 내겐 필요 없으니까."
무라카미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그런 그의 태도를 보며 하야미는 어처구니가 없는 정도를 넘어 분노마저 느꼈다. 무라카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크로노스에 대한 분노였다.
"그건 그렇고, 다른 놈들은 어디 있지? 하야미씨 당신 말고도 세 명이 그 때 같이 탈출하지 않았던가?"
"모두 죽었소. 우리들의 저항 의지를 케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모두들 자신의 몸을 바쳐 그 길을 열어 주었소!"
"그런가...."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무라카미는 이윽고 다시 핫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핫세는 계속해서 떨고만 있었다.
"하지만 핫세, 넌 아냐. 넌 이들과는 달리 싸울 이유 따위는 전혀 없어. 너 정도는 그냥 놔둬도 상관없다는 말이지. 자, 어서 와. 그리고 한 마디만 해. 크로노스가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말이야."
모두들 긴장된 표정으로 핫세를 주목하였다. 핫세는 척 보기에도 많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라카미의 말은 따지고 보면 다 옳았다. 핫세는 어쩌다가 우연히 조아노이드를 목격해서 크로노스의 표적이 된 것일 뿐이었다. 크로노스가 어둠속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당시에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핫세를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제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낸 지금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반드시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저 크로노스가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만 살면, 즉 쓸데없는 소리 안하고 순순히 사육되어지는 걸 받아들인다면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싫어요."
"응? 지금 뭐라고 했지?"
"싫다고요! 그런 건 싫어요!"
핫세는 처음에는 간신히 말을 꺼냈지만 이윽고 뭔가가 북받쳐 오르는 듯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싫어요! 나만 살아남는 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는 거 전 싫다고요! 나만 살자고 베르단디 선배랑 케이 선배, 그리고 다른 여러분들을 배신할 수는 없어요! 이들은 모두 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이 분들과 함께가 아니면 전 안가요!"
"핫세씨..."
"핫세, 너는...."
모두는 그런 핫세의 모습에 감동하였다. 핫세는 잠시 모두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다시 무라카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리고 저도 크로노스와 싸워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 동안 크로노스가 저질러 온 만행들은 저도 똑똑히 봤어요. 저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그래도 크로노스에게 굴복할 수는 없어요! 전 인간이니까요!"
핫세가 설령 무라카미의 말을 받아들여 크로노스의 발아래 엎드리는 조건으로 자유를 얻는 것을 선택했다 해도 모두는 솔직히 핫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무라카미의 말대로 핫세는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인 피해자였고 크로노스와 목숨 걸고 맞서야 할 이유같은건 없었다. 게다가 핫세는 원래 여린 성격이었고 누구보다도 도피 생활을 힘겨워했다. 베르단디의 경우에는 핫세가 차라리 무라카미에게 가는 것을 택해서 이 싸움에서 벗어나 원래의 평온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바랐을 정도였다. 그런 핫세도 어느 샌가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크로노스에게 굴복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의 발아래에 엎드려서 목숨을 구걸하는 것 자체가 자유가 아니었다.
"그래....핫세. 네 뜻은 잘 알겠어."
무라카미는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두 눈을 부릅뜨며 핫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게 네 뜻이라면 다 같이 죽여주마!!"
"크아아아!!!"
무라카미의 외침을 신호로 엔자임들이 포효하며 케이들을 포위하였다. 케이들은 자세를 낮추고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등 뒤로 베르단디들을 모아서 그녀들을 보호하였다.
"이 신형 엔자임들, '엔자임 III' 가 너희들을 갈가리 찢어발길 꺼다. 그 때 가서는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해봐야 소용없어!"
"누가 울고불고 한다고 그러냐!!"
그 순간 앱톰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머리의 생체 열선포를 전개하고는 바로 자기 앞을 막고 있던 엔자임 III 의 가슴 한 복판을 조준하고 생체 열선포를 발사하였다.
-푸슝!!
-퍼억!
"끼엑!!"
앱톰의 빔은 그대로 엔자임 III의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하였다. 그렇게 한 마리를 처리한 앱톰은 나머지가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연속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등 부분의 1만 볼트 전기 채찍을 꺼내 들어서는 옆에 있던 다른 한 마리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곧장 최대 출력의 전기 공격을 퍼 부었다.
-파지지직!!
"캬아악!!"
앱톰의 전기 충격을 받은 엔자임 III 는 그대로 잘 구워진 전기구이 통닭 신세가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앱톰이 두 마리를 해치워버리자 나머지 두 마리가 그 자리에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앱톰은 그 두 마리도 절대로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른손의 생체 미사일 컨테이너를 열고는 그 두 마리에게 미사일 세례를 퍼부었다.
"어딜 도망가!!"
-푸슈슝!!
-퍼퍼퍽!!!
생체 미사일들은 순식간에 엔자임 III 들의 몸 여기저기에 박혀 버렸다. 이제 잠시 후면 미사일이 폭발할 거고 그러면 저 두 마리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릴 것이다. 순식간에 엔자임 III 네 마리를 해치워 버린 앱톰은 코웃음 쳤다. 가이버에게는 천적이겠지만 강식장갑 분해효소 같은 것과는 상관도 없는 자신에게는 그야말로 손쉬운 사냥감일 뿐이다. 이런 녀석들 네 마리 쯤이야 혼자서도 30초면 충분히 정리하고도 남을....
'응? 뭐지?'
그 순간 앱톰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엔자임들에게 박힌 생체 미사일들이 폭발하지 않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지연신관(목표에 명중 즉시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지연 시간을 보낸 후 폭발하는 신관. 주로 단단한 목표를 관통 후 내부에서 폭발시킬 목적으로 사용) 으로 설정하고 발사하면 상대의 몸에 파고들어간 후 1초 정도면 그냥 폭발해 버리는데 지금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이다. 한두 발도 아니고 발사한 미사일 전부가 다 불발이란 말인가.
-우드득!! 콰직!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사일들에 관통당한 엔자임 III들의 피부가 빠른 속도로 재생되기 시작하더니 미사일들을 그대로 바스러뜨려 버린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엔자임들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앱톰은 전혀 의외의 결과에 크게 놀랐다.
"크아아!"
그 순간 앱톰의 옆쪽에서 또 다른 엔자임이 달려들며 그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앱톰은 그 공격을 간신히 피해내었다. 이번에 달려든 놈은 방금 전에 앱톰이 고압 전기로 바짝 구워버린 녀석이었다. 이 녀석 역시 1만 볼트의 전기에 노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것이다!
"카아악!!!"
-부욱!!
"으악!!!"
그러나 앱톰은 바로 자기 등 뒤에 나타난 또 다른 엔자임의 공격에 등을 할퀴고 말았다. 그는 주춤거리면서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이번에 달려든 녀석은 아까 맨 처음에 자기가 생체 열선포로 가슴에 커다란 바람구멍을 내 준 녀석이었다. 놀랍게도 이 녀석 역시 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상처도 앱톰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복구되어 버렸다.
"뭐...뭐 이런 괴물 녀석들이!!"
앱톰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가 엔자임 III의 놀라운 회복력에 경악하였다. 앱톰의 공격들은 하나같이 전부 다 치명타였음에도 불구하고 엔자임 III 는 단 한 마리도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상처를 스스로 빠르게 수복한 후 앱톰에게 반격까지 하였다. 이전의 엔자임 I, II 와는 모습만 다른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달랐다. 무라카미는 여유 있게 웃으면서 말했다.
"후...너 혼자서 이 엔자임 III 들을 상대하겠다고? 어려울껄. 이 녀석들은 그저 강식장갑 분해효소만 가지고 있는 게 아냐. 가이버를 훨씬 능가하는 운동능력과 자기 수복 능력등도 갖췄으니까. 게다가 이 녀석들은 가이버의 천적만이 아냐. 너의 천적이기도 하지."
"무슨 뜻이냐!"
"아직도 모르겠나? 지금쯤이면 눈치 챘을 텐데? 네 등에 난 상처."
앱톰은 무라카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눈치 채었다. 방금 전에 엔자임 III가 할퀸 상처가 전혀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정도 상처라면 순식간에 복원이 되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녀석들은 일전의 젝토올처럼 앱톰의 융합포식에 대비한 항체와 앱톰의 신진대사를 저해시키는 바이러스까지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앱톰으로서도 이 녀석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뭐 저렇게 성능을 올려둔 덕분에 저 엔자임들은 길어야 2년 살면 오래 사는 거지. 워낙에 운동능력과 회복 능력을 끌어올려놔서 말이야. 세포가 그만큼 빨리 노화되는 거지. 하지만 뭐 어때. 어차피 이 녀석들은 한 번 쓰고 버릴 소모품들인데."
엔자임 III 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베르단디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스쿨드는 아예 베르단디의 품에 파묻혀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아키토와 앱톰은 도저히 힘들겠다고 판단한 케이가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이제 저 엔자임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압도적인 전투력의 기간틱을 쓰는 케이뿐 이었다.
"잠깐. 케이, 넌 나와 싸워야 격이 맞지. 안 그래?"
그 순간 무라카미가 케이를 지목하였다. 엔자임들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그만 무라카미를 잊고 있었다. 그가 이 상황에서 가만히 뒷짐만 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케이는 순간 망설여졌다. 무라카미와는 도저히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무라카미는 설득한다고 다시 원래의 인격으로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다. 도주도 불가능한 상황. 결국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싸우는 것 밖에는 길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좋아, 그래야지. 기간틱은 저런 잔챙이들 상대로는 너무 과하다고."
"그러나!"
-위잉!
케이는 복부의 중력 제어구를 조종해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날아오르면서 케이는 무라카미에게 소리쳤다.
"싸우는 장소는 여기가 아닙니다!"
"좋다!"
무라카미 역시 케이를 뒤 쫓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무라카미와 싸울 거라면 베르단디들이 있는 지상에서는 싸울 수가 없었다. 상대는 조아로드. 그런 엄청난 상대와 싸운다면 주변은 사실상 초토화가 될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베르단디들까지 말려들고 말 것이다. 그래서 케이는 베르단디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투 장소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케이씨!!"
케이와 무라카미가 날아오르자 베르단디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녀는 케이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전의 동료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케이의 기구한 운명에 슬퍼하였다. 베르단디는 케이가 올라간 하늘을 계속해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두 사람의 모습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봐, 여신. 케이보다는 지금 우리가 더 급해."
앱톰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베르단디에게 한 마디 하였다. 앱톰의 말에 베르단디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의 말대로 지금 자신들도 목숨이 위험한 것이다. 저 무시무시한 엔자임들 때문에 케이를 돕는 건 고사하고 자기들 목숨 부지하기도 위험했다.
"다들 뒤쪽으로 피해 있어!"
아키토가 모두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일행 중에서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는 아키토와 앱톰, 린드가 엔자임 III 들을 상대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하야미도 앞으로 나서려고 하였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손종실험체지만 저도 조제를 받았기 때문에 전투력은 어느 정도..."
"시끄러. 방해만 되니까 뒤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마."
앱톰은 하야미의 결심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앱톰이 보기에는 하야미 수준의 전투력으로는 놈들에게 한 방에 죽을게 분명했다. 조제를 하면서 무기라고 하나 달아놓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저런 놈들에게는 통할 물건이 아니었다.
어쨌든 상황은 아키토들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기간틱인 케이가 무라카미와 싸우러 공중으로 올라갔으니 이제 남은 셋이서 저 네 마리의 엔자임들을 상대해야 했다. 수적 열세인건 둘째치더라도 이 엔자임들은 가이버와 앱톰의 특성에 맞춰져서 만들어진 이른바 '천적'이기 때문에 접근전을 벌이기가 힘들었다. 유일하게 바이러스나 분해효소와는 무관한 존재인 린드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 혼자서 저 엔자임 네 마리를 다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격투전을 할 수가 없는 베르단디나 울드가 싸움에 가세할 수도 없었다. 대 조아노이드용 법술로 후방 지원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만약 난전이 되게 되면 그것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부우웅!
린드는 등에 메고 있던 고주파 엑스를 들고 전원을 넣었다. 스쿨드가 만들어 준 대 조아노이드용 고주파 병기. 원리적으로는 가이버의 고주파 소드와 같은 무기인지라 어떤 물체든지 확실하게 베어 버릴 수가 있다. 그러나 배터리 문제 때문에 사용시간은 겨우 20분. 그 안에 저 네 마리를 모두 베어야 했다. 하지만 린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회복 능력이 대단한 놈들이라고 해도 머리를 베어버리면 별 수 없다. 게다가 앱톰과 가이버 III 는 저들을 상대로 싸우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공격의 핵심은 린드 자신인 것이다. 그녀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여기서 자신들이 쓰러지면 뒤에 있는 다른 사람들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
"베르단디! 울드! 우리를 후방에서 지원해줘. 굳이 공격 법술이 아니라도 돼. 놈들의 주의만이라도 흩어줘."
"알았어!"
"네, 알겠어요."
주의를 끄는 것도 말이 쉽지 자칫 잘못하다가 한 마리라도 저 두 사람에게 달려드는 일이 벌어지면 그게 더 큰일이었다. 그 때가 되면 린드로서도 저 두 사람을 지켜주는게 쉽지 않을 터였다. 린드는 저 두 사람은, 특히 베르단디만큼은 싸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열세를 극복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수적 열세라도 극복해내야 했다. 베르단디와 울드는 각오를 단단히 한 듯 즉시 법술로 여신 특유의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베르단디는 귀걸이의 장식 부분을 떼어내서 법술 지팡이를 만들어내었다.
"좋아! 간다!!"
"이야아아!!!!"
아키토, 린드, 앱톰은 함성을 지르며 엔자임 III 들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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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웅!
"큭!"
케이는 무라카미가 날린 빔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하늘 높이 올라온 지금 두 사람은 공중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케이는 싸움을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에 무라카미의 일방적 공격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무라카미는 케이의 그런 마음 따위는 내 알바 아니라는 듯이 거침없이 공격을 퍼 부었다.
"하하하!! 왜 그러냐, 기간틱! 넌 겨우 이 정도 놈이었냐!"
한 순간 갑자기 무라카미가 케이에게 돌진해 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무라카미는 케이의 이마에 있는 듀얼 컨트롤 메탈로 손을 뻗었다. 기습에 당황한 케이가 무라카미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곧장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아니, 적극적으로 힘을 주고 있는 쪽은 여전히 무라카미였다. 케이는 아직까지 그저 버티고만 있었다.
"후후후, 내가 무라카미인 이상 넌 날 공격 못해. 안 그래? 이 마음 약한 녀석아! 후하하하!!!"
"...무...무라카미씨..!"
알고 있어. 싸워야 해. 지금의 무라카미씨는 이미 적이야. 쓰러트리지 못하면 모두가 위험해. 하지만...하지만...!
"싸우기 싫으면 얌전히 그 이마의 컨트롤 메탈을 바치라고! 그럼 편하게 죽게 해 주지!!"
무라카미가 한층 더 힘을 주기 시작했다. 케이는 힘에서 밀리는 것을 느꼈다. 물론 기간틱의 힘을 좀 더 발휘하면 이 정도 쯤이야 압도할 수 있지만...
'케이....우리들의 의지를....헛되게.....하지 마.....'
그 순간 케이의 눈앞에 1년 전의 그 비극적인 광경이 스쳐지나갔다. 무라카미의 영혼의 통곡이, 오다기리 주임의 의지가, 케이마씨의 비극적 죽음이.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케이는 드디어 결심하였다.
"큭!! 이...이건...!!"
케이가 힘을 주기 시작하자 무라카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갑자기 케이의 힘이 폭발적으로 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오히려 무라카미가 밀릴 지경이 되었다. 조아로드를, 그것도 백병전에 특화된 자신을 힘으로 압도할 정도라니. 무라카미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손을 풀고 케이에게서 황급히 물러났다.
"크...그래. 이제야 싸울 마음이 생겼나 보지?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한 번 해 볼까!"
케이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자세를 취했다. 이제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없다. 싸우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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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으악!!"
엔자임 III 의 날카로운 손톱이 아키토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 충격으로 아키토는 뒤로 쓰러졌다. 아키토의 온 몸에는 엔자임과의 접근전 과정에서 생긴 손톱자국들이 잔뜩 있었다. 엔자임 III 의 손톱에도 강식장갑 분해 효소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저런 상처들이 생긴 것이다. 엔자임 III 가 쓰러진 아키토에게 일격을 가하려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키토님!!!"
아키토의 위기에 시즈가 비명을 지르며 돌멩이를 힘껏 엔자임 III 의 안면을 향해 던졌다. 물론 가냘픈 시즈가 던진 돌멩이 정도가 엔자임에게 충격을 줄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잠시 주의를 돌리는 데는 충분했다. 엔자임 III 의 주의가 딴 데 가있는 찰나의 순간, 아키토가 즉시 헤드빔을 발사하였다.
-푸슝! 퍼억!!
"카악!!"
헤드빔은 엔자임의 복부를 완전히 관통하였다. 아키토는 그 상처 부위를 힘껏 밀어차서 엔자임을 멀리 떨어 트려놓았다. 그리고 황급히 일어서서 자세를 갖췄다. 아키토는 피로가 극에 달한 듯 심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입 부근의 공기 흡입구에서 쉴 새 없이 공기를 내뿜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엔자임III 는 그 정도 타격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곧장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아키토가 뚫어버린 복부의 관통상 역시 순식간에 수복되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아키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떤 공격을 퍼부어도 이내 데미지가 회복되어 버리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앗!"
-부웅!!
린드 역시 상황이 절대 좋지 못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른 고주파 엑스를 엔자임은 아주 가볍게 피해내었다. 스피드만큼은 확실히 능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엔자임 III 의 스피드 역시 대단히 빨랐다. 전작인 엔자임 II 가 그 덩치 때문에 스피드 면에서는 좀 불리한 거대한 곰이라고 한다면 이번의 엔자임 III 는 작아지고 날렵해진 체구 덕분에 발군의 스피드를 가진 표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린드의 몸 여기저기에도 엔자임의 손톱에 긁힌 자국이 여럿 있었다.
-휘릭!
"웃!"
엔자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다란 꼬리를 기습적으로 휘둘렀다. 린드는 간발의 차로 꼬리를 피해내었다. 엔자임의 꼬리 끝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빽빽이 박혀 있어서 마치 철퇴처럼 상대방에게 휘두를 수 있었다. 게다가 평소에는 잘 안보이다가 기습적으로 휘둘러 대니 자칫 잘못하면 여기에 찔려 죽을 수도 있었다.
"이야압!!"
꼬리를 피한 린드는 즉시 반격을 하였다. 린드는 고주파 엑스를 휘둘러 노출돼 있는 꼬리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엔자임에게 바짝 접근하였다. 엔자임이 린드의 접근을 막으려는 듯이 손톱을 날카롭게 세운 후 그녀에게 휘둘렀다.
-부웅!! 촤악!!
"끼엑!"
그러나 린드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녀의 고주파 엑스가 번뜩이는 순간 이미 엔자임의 팔은 완전히 잘려나가 버렸다. 린드는 그대로 놈의 목을 치기 위해 다시 고주파 엑스를 휘둘렀다.
-휘익!
그러나 린드가 재공격을 하려는 그 찰나의 순간에 엔자임 III는 그 발군의 운동능력을 살려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엔자임은 린드의 고주파 엑스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녀의 공격에 맞상대를 한 것은 이렇게 뒤로 물러날 찬스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 있던 또 다른 한마리가 린드에게 달려들었다.
"키아아!!"
"큭!"
린드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먼저 린드에게 팔을 잘린 그 엔자임 III가 땅에 떨어진 자기 팔을 회수하였다. 그리고 잘린 부위에 맞춰 갔다대자 이내 팔의 절단부위가 다시 붙어버렸다. 설령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간다 해도 곧바로 도로 갔다 붙이면 회복될 정도로 엔자임 III의 치유력은 굉장했다. 린드는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린드를 두 마리의 엔자임 III가 포위하고 있었다. 아키토와 앱톰은 각자 맡은 엔자임이 버거워서 그녀를 도울 상황이 못 됐다. 잠시 전열을 가다듬은 두 마리가 일순간 동시에 린드에게 달려들었다.
"땅의 정령이여! 그대의 굳건한 육체로 나의 벗을 지켜다오!"
-우르르릉!! 쿠콰콰!!
그 때 베르단디가 타이밍을 맞춰 법술을 외웠다. 그러자 린드에게 달려들던 두 마리의 엔자임의 바로 앞에 거대한 흙의 장벽이 솟구쳐 올랐다. 흙의 장벽은 그대로 두 마리의 엔자임을 덮쳤다. 그러자 곧장 울드가 흙더미에 매몰된 엔자임 III들에게 공격 법술을 걸었다.
"울어라!! 뇌광이여! 쳐부숴라!! 파괴의 힘이여!!!"
-콰르르릉!!!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울드가 만들어낸 거대한 벼락이 엔자임들이 매몰된 흙더미 바로 위에 내리꽂혔다. 이 법술식은 겉보기에는 같은 벼락이긴 하지만 이전의 법술체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창한 '대 조아노이드용' 법술이다. 게다가 그 위력도 한층 높인 상태이기 때문에 아마도 저 두 마리는 그대로 숯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울드는 숨을 헐떡이며 상황을 가만히 주시하였다. 베르단디의 호흡도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다. 아까부터 두 사람도 최선을 다해 일행을 법술로 지원하고 틈나는 대로 공격 법술도 구사하였기 때문에 피로가 오기 시작했다. 특히나 대부분의 힘이 봉인돼 있는 베르단디의 피로가 더 컸다.
"해치운 건가? 베르단디. 일단 해치운 것 같으니 넌 좀 쉬어. 이후의 지원은 나 혼자서도..."
-푸화악!!!
"크아아아!!!"
그 순간 갑자기 흙더미가 솟구쳐 오르면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엔자임 III였다. 두 마리 다 모두 건재해 있었다. 이번에도 법술 공격이 먹히지 않은 것이다!
"피해!!!"
린드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두 마리의 엔자임 III중 한 마리는 린드에게 달려들었다. 나머지 한 마리는 바로 베르단디와 울드에게 달려들었다! 린드는 마음이 급해졌다. 저 두 사람은 엔자임과 백병전을 벌일 능력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린드를 막고 있는 엔자임이 집요하게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한 마리가 이렇게 린드의 발을 묶는 동안 나머지 한 마리가 저 두 사람을 해치우려는 것이다!
-부웅!!
엔자임 III가 자신의 긴 꼬리를 울드에게 휘둘렀다. 울드는 그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단순 견제행동이었다. 엔자임의 일차 목표는 베르단디였다!
"꺄악!!"
-쿠당탕!
"베르단디!!"
"언니!!!"
엔자임 III는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베르단디를 밀어 넘어뜨렸다. 베르단디는 땅에 쓰러진 채 법술 지팡이로 엔자임의 손톱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그러나 완력에서 큰 차이가 나는 엔자임 III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법술 공격으로 밀어낼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엔자임 III의 누르는 힘에 간신히 버티는 것이 한계였다. 엔자임 III가 그대로 베르단디를 해치우기 위해 남은 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엔자임의 날카로운 손톱이 번뜩였다.
-휘리릭!!
"키익?!!"
그 순간 어디선가 검은 색의 채찍 같은 것이 날아와서 엔자임 III 의 목을 휘감았다. 채찍은 이내 팽팽하게 당겨졌고 엔자임 III는 숨이 막히는지 그 자리에서 버둥거렸다. 깜짝 놀란 울드가 채찍이 날아온 방향을 보자 그 곳에는 앱톰이 있었다. 앱톰이 자기의 전기 채찍을 날려 엔자임의 목을 휘감아 베르단디를 구해준 것이다!
"네 놈 상대는 바로 나야!! 엔자임!"
일단 엔자임의 목을 전기 채찍으로 휘감기는 했지만 계속된 부상과 엔자임 III에게서 옮은 바이러스의 영향 때문에 체력이 고갈된 앱톰은 고압 전기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채찍을 올가미 삼아 상대방을 묶어두는 수준 정도밖에는 쓸 수가 없었다. 앱톰이 있는 힘을 다해 채찍을 확 잡아당겼다.
"으압!!"
-부웅!!
앱톰은 그대로 엔자임 III를 낚아채서 반대편으로 던져 버렸다. 그 덕에 베르단디는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울드가 황급히 달려가서는 베르단디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베르단디에게는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 베르단디는 미소를 지으며 앱톰에게 말했다.
"고...고맙습니다. 앱톰씨. 덕분에 살았..."
"젠장! 방해돼! 차라리 멀리 도망쳐!!"
베르단디의 감사 인사에 대해 앱톰은 그저 화만 잔뜩 내었다. 그 순간 앱톰이 상대하고 있던 엔자임이 앱톰의 등을 기습공격 하였다.
-퍼억!
"끄아악!!"
"앱톰씨!!"
엔자임 III의 손톱은 앱톰의 등을 크게 할퀴었다. 앱톰은 비틀거리면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빠져 나오면서 그는 엔자임을 견제하기 위해 생체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푸슝!!
그러나 체력이 고갈된 앱톰이 만든 미사일은 겨우 한 발이었다. 자신의 채조직을 증식시켜 만들어야 하는 생체 미사일은 사용자의 체력이 바닥나면 만들기가 극히 힘들어진다. 앱톰은 아까의 교훈을 살려 이번에는 닿자마자 폭발하는 착발신관으로 설정하고 발사하였다.
-콰쾅!!
생체 미사일은 그대로 엔자임의 복부에 명중하였다. 그러나 엔자임에게는 큰 타격이 없었다. 앱톰은 욕지거리를 내 뱉으며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단 모여! 이대로는 위험해!"
린드가 모두에게 소리쳤다. 아키토와 앱톰은 일단 베르단디들이 있는 곳으로 한데 모였다. 잠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함이었다. 엔자임 III들도 잠시 쉬려는 듯 자세만 취한 채로 서 있었다. 세 사람의 전사는 지금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게다가 체력도 이미 모두 바닥난 상태였다. 린드야 베르단디들이 회복시켜 줄 수 있지만 조제체인 앱톰과 가이버인 아키토는 회복시켜 줄 방법이 없었다. 조아노이드와는 다른 유전자 구조를 가지고 있는 앱톰에게 함부로 회복 법술 같은 걸 걸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고 가이버의 강식 장갑은 원래 법술을 거부하는 특성이 있어서 회복 법술을 걸어줄 수가 없었다. 물론 아키토의 경우에는 식장을 벗으면 그 때 베르단디들이 회복시켜 줄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함부로 그럴 수가 없었다. 베르단디는 일단 린드만이라도 회복 법술을 걸고 있었다. 베르단디 자신도 많이 지친 상태인지라 회복 속도가 평소보다 더뎠다.
"이제 어쩌지? 우리 공격은 놈들에겐 전혀 안 통해."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순식간에 회복되는 무서운 신진대사능력. 무시무시할 정도의 운동능력. 더불어 가이버와 앱톰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분해 효소와 바이러스들 때문에 아키토와 앱톰은 함부로 백병전을 걸 수가 없었다. 해 봐야 이쪽만 손해인 것이다. 유일하게 그런 것들과는 무관한 린드의 경우에는 필살 병기인 고주파 엑스의 배터리가 거의 다 돼가고 있었다. 앞으로 잘해야 2~3 분. 배터리가 방전되고 나면 평범한 도끼 수준도 안 되는 것이 고주파 엑스다. 남은 시간 안에 저 놈들을 전부 해치우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통하는 게 딱 하나 있지."
그렇게 말하면서 앱톰은 아키토를 바라보았다. 아키토는 앱톰의 말뜻을 금방 눈치 채었다. 바로 메가 스매셔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소멸 시키는 가이버의 메가 스매셔라면 저 녀석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아무리 회복 능력이 대단한 놈들이라고 해도 통째로 소멸시켜 버리면 별 수 없다.
그러나 아키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태로는 스매셔는 딱 한 번 밖에 쓰지 못한다. 게다가 원래 스매셔는 발사에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동안 가이버는 사실상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아키토가 메가 스매셔를 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빠른 스피드를 살려 메가 스매셔에 전부 휩쓸리지 않도록 사방에서 덮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엔자임 한두 마리 정도라면 몰라도 네 마리 전부를 한꺼번에 해치울 수는 없었다. 한 마리라도 남으면 그 땐 정말 대책이 없었다.
"내게 방법이 있으니까 그런 건 걱정 말고 스매셔나 언제든지 쏠 수 있게 준비해 놔."
아키토는 일단 앱톰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떤 비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메가 스매셔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나머지는 여기 있어. 방해만 되니까. 자! 그럼 간다!!!"
-파앗!
앱톰이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자 엔자임들이 모두 앱톰에게 달려들었다.
"자! 여기다 이놈들아!! 나 잡아봐라!!"
앱톰은 큰 소리로 외치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엔자임들은 괴성을 지르며 앱톰을 쫓아다녔다. 앱톰은 겉보기에는 그저 아무데로나 돌아다니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는 엔자임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씩 베르단디들에게서 떨어트려놓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고 판단한 앱톰이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크아아아!!!"
멈춰 서자마자 엔자임 III들이 달려들었다. 엔자임들의 날카로운 손톱이 멈춰선 앱톰의 온 몸을 잔인하게 할퀴었다. 바로 그 순간 앱톰이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작전을 시작했다. 엔자임들이 자신과 바짝 붙어있는 지금이 바로 찬스였다.
-휘리릭!!
앱톰의 등 뒤에 있던 전기 채찍 두 개가 순식간에 엔자임 III 두 마리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남은 두 마리는 앱톰 자신이 양 팔로 꽉 붙잡았다. 그런 식으로 앱톰은 그들의 움직임을 혼신의 힘을 다해 봉쇄하였다. 그 상태 그대로 앱톰이 아키토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지금이다! 메가 스매셔를 쏴!!"
그 말을 들은 모두는 경악하였다. 앱톰의 비책이란 게 이런 것이었다는 말인가!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엔자임 III들의 움직임을 봉쇄한 후 메가 스매셔로 한꺼번에 날려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에서 스매셔를 날리게 되면 앱톰 본인도 절대 무사할 수가 없었다. 엔자임들과 같이 그대로 휩쓸려 버리는 것이다!
-철컥!! 키이이잉!!!
그러나 아키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양쪽 가슴의 장갑판을 열어 젖혔다. 곧이어 스매셔 발사기관에 에너지가 모이기 시작했다. 베르단디가 아키토를 말렸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스매셔가 발사 직전에 이르자 베르단디가 앱톰에게 소리쳤다.
"앱톰씨! 빨리 피하세요!!"
"난 상관마! 빨리 쏘란 말이야!!"
계속된 부상과 바이러스로 인해 체력이 바닥난 앱톰은 지금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가며 엔자임들을 묶어두고 있었다. 아마도 마음이 여린 케이라면 절대로 못할 방법이겠지만 아키토라면 그 점은 문제없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으니까. 이제 잠시 후면 메가 스매셔가 발사된다. 그리고 그 때 마지막 작전을 할 차례다. 그러나 체력이 고갈된 자신에게 과연 그게 가능할까?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몸을 피한답시고 손을 풀었다간 이 녀석들을 전부 놓치고 만다. 해 보는 수밖에 없다!
-퍼어어엉!!!!
드디어 아키토의 메가 스매셔가 불을 뿜었다. 엄청난 빔의 폭포가 앱톰과 엔자임들을 덮쳤다. 메가 스매셔의 섬광은 앱톰과 엔자임 III 들을 덮친 이후에도 계속해서 앞으로 뻗어나가며 그 앞쪽의 숲을 초토화 시켰다.
-쿠쿠쿠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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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슝!!
케이는 무라카미를 노리고 헤드빔을 쏘았다. 무라카미는 그것을 간단하게 피하고 곧장 반격탄을 날렸다. 케이 역시 그 공격을 가뿐하게 피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케이에게 그다지 유리하지 못했다. 무라카미가 케이보다 고도를 더 낮춘 채로 원거리 공격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케이가 접근전을 시도할라 치면 무라카미는 무조건 거리부터 벌렸다. 게다가 무라카미가 아래쪽을 점하고 있기 때문에 케이로서는 함부로 강력한 공격을 시도할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빗나가기라도 하면 그 빗나간 광선이 지상에 큰 피해를 입힐까봐 그러는 것이었다. 기가 스매셔는 말할 것도 없고 프레셔 캐논도 최대출력으로 발사하면 너무 위험했다. 그렇다고 위력을 떨어트려 쏘는 것은 무라카미에게 통하지 않았다.
'훗. 어떠냐, 케이. 내가 아래를 잡고 있는 이상은 그 잘난 기가 스매셔는 쏘지 못해. 넌 그런 놈이니까!'
무라카미는 계속 이렇게 아래쪽에서 원거리전 만으로 승부를 보려 하였다. 아까 잠깐 동안의 힘겨루기에서 뼈저리게 느낀 거지만 완력 에서는 도저히 자신은 기간틱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분하지만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거리 공격만큼은 기가 스매셔만 봉쇄한다면 충분히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받아라! 스파이럴 크랏샤!!"
-휘오오오!!
무라카미가 에너지를 모으더니 곧장 케이를 향해 빔의 소용돌이를 발사하였다. 강력한 빔이 소용돌이처럼 맹렬하게 회전하며 케이에게 날아갔다.
"좋아! 이거야!!"
그러나 케이는 그것을 막거나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빈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전속력을 다해 무라카미에게 날아갔다. 무라카미는 깜짝 놀랐다. 설마 스파이럴 크랏샤를 피하지 않고 역으로 이용할 줄이야!
-투둑! 빠캉!! 콰직!
그러나 회오리의 한 가운데는 기간틱의 덩치보다 다소 작았기 때문에 케이는 날아가는 와중에 몸의 돌출된 부분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케이는 거기에 개의치 않고 그저 무라카미와의 거리를 줄이는 것에만 집중하였다. 당황한 무라카미가 다시 공격을 하였다.
"그래비티 불렛! 먹어랏!!"
-파파팡!!
무라카미의 두 주먹에서 무수히 많은 작은 중력탄들이 크레모어처럼 케이를 덮쳤다. 그러나 케이는 그것조차 피하지 않고 그냥 몸으로 받아 내었다. 기간틱의 강인한 장갑 외피 여기저기에 상처가 났다.
"이익! 이 자식이!"
-파앗!!
무라카미가 손에 에너지를 최대한 집중시킨 후 자신의 특기인 절단파를 발사하였다. 무라카미의 손에서 거대한 빛의 칼날이 발사돼서 케이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갔다. 그러나 케이는 이번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콰직!!
케이는 몸만 살짝 틀어 그것을 피했다. 그러나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었다. 왼쪽 어깨의 바리어 발생장치가 절단파에 맞아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무라카미는 기가 막혔다. 지금 저 바보가 같이 죽자고 저러는 건가! 이제 케이가 바로 코앞에 까지 왔다. 더 이상 공격할 기회는 없었다. 무라카미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케이는 고주파 소드를 전개하였다.
'무라카미씨!'
-스릉!
'저는 당신을....쓰러트릴 겁니다!'
-휘이잉!!
케이는 있는 힘껏 고주파 소드를 휘둘렀다. 목표는 바로 무라카미의 목! 케이의 고주파 소드가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자 무라카미의 표정에 공포가 나타났다. 케이는 승리를 확신하였다. 완벽한 찬스였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조금만 더 하면 무라카미는... 무라카미는....!!
"......"
"....!"
-위잉! 위잉!
그러나 어째서인지 고주파 소드는 무라카미의 목 바로 앞에서 멈췄다. 무라카미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목덜미에 바짝 붙어 있는 고주파 소드를 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하면 자신의 목을 벨 수 있는데도 어째서 멈춘 걸까? 승리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어째서!
'안 돼! 난 역시...무라카미씨를 벨 수가 없어....'
케이는 마지막 순간, 무라카미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도저히, 도저히 벨 수가 없었다. 예전의 동료였던, 케이에게 싸워야 할 의미를 가르쳐 준 사람을 벨 수가 없었다. 다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케이. 그는 이렇게 비정해야 할 순간에 도저히 비정해질 수가 없었다.
"큭! 어리석은 놈 같으니!!"
퍼뜩 정신을 차린 무라카미가 황급히 케이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케이는 곧장 무라카미를 재공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나마 공포에 질렸던 무라카미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호흡이 다소 거칠었다. 허나 얼마 안 있어 호흡은 다시 안정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전투자세를 잡았다. 그의 얼굴에서 아까까지의 여유가 사라졌다. 방금 전에는 다소 방심해서 역습을 허용했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다!
"산산조각을 내 주마. 가이버 기간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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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앱톰도 있었잖아! 그런데도 쏴 버리다니! 우리랑 함께 싸워주기 까지 했는데 너란 놈은!"
울드는 화를 내며 아키토에게 거칠게 항의하였다. 절호의 찬스였다는 것은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료까지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아키토의 비정함에 울드를 비롯한 모두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아키토는 태연했다.
"이봐. 진정해. 앱톰은 아직 살아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아키토는 방금 전까지 앱톰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모두가 그 쪽을 보자 분명히 모든 게 소멸돼서 아무것도 없어야 할 땅바닥에 뭔가 검은 물체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해가 다 져버려서 숲 속은 무척 어두웠다. 모두는 그 곳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거기 있던 것은 팔다리가 다 잘려져 나가 몸통과 머리만 남은 앱톰이었다!
"애...앱톰?!!"
"괜찮으세요?"
"....젠장, 여신. 당신 눈엔 이게 괜찮아 보여?"
베르단디의 걱정 어린 말에 앱톰은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꾸하였다. 다행히도 앱톰은 사지를 다 잃기는 했지만 살아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앱톰은 자기 회복 능력이 있으니 한 몇 시간만 있으면 소실된 팔과 다리도 다시 생길 것이다. 엔자임들은 앱톰의 희생덕분에 다 없애 버렸으니 이제 모든 게 괜찮아 졌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메가 스매셔를 맞고도 살아남은 거지?"
"젝토올이 썼던 방법을 좀 흉내 내 봤지."
린드의 물음에 앱톰이 답변하였다. 앱톰은 일전에 케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젝토올이 가이버 III의 메가 스매셔를 막아냈던 방법을 썼던 것이다. 머리의 충각에 최대한의 전자파를 집중시켜 일종의 전자파의 칼날을 만들어 메가 스매셔의 광선을 갈라버린다. 한 점에 최대한의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간틱이나 조아로드의 바리어처럼 일정 구역 전체를 다 막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자기는 전자파의 칼날로 메가 스매셔를 막고 나머지 엔자임 III 들은 그대로 빔에 노출되고 만다. 이것이 앱톰의 작전이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앱톰은 젝토올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흉내 내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젝토올처럼 전신을 다 커버하려 했다간 엔자임 III를 한 마리라도 놓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전자파의 집중은 아주 최소한의 범위로 좁혀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사지를 다 잃기는 했지만.
"후...."
"아키토님...."
아키토는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자 피로한 듯 비틀거렸다. 그런 그를 시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부축하였다. 앱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아키토 역시 만신창이였다. 만약 지금 이 상태에서 적이 또 나타난다면 그땐 정말 속수무책이었다. 어서 빨리 어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있어야....
-투화악!!
그 때였다! 앱톰의 머리 위쪽 부근의 땅 속에서 갑자기 뭔가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 튀어나온 물체는 그대로 아키토에게 달려들었다. 땅에서 솟구쳐 오른 것은 놀랍게도 엔자임 III였다! 메가 스매셔가 덮치기 직전의 찰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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